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이십대 초반의 나는 상당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관객이었다. 특히 연기자는 다른 것보다 일단 연기를 잘해야 좋은 배우라 할 수 있고 가수는 얼굴이 잘생겨야… 아, 이게 아니지. 어쨌든 배우에게 ‘꽃미남’이니 ‘패셔니스타’니 하는 호들갑스런 수식어를 붙여 띄우는 매스미디어의 행태에 코웃음을 칠 만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차가운 도시 여대생이었단 얘기다. 그러니 ‘강동원’이라는 꽃미남 모델이 ‘귀여니’ 원작의 영화 <늑대의 유혹> 주연을 맡았다며 같이 보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패션에 문외한이라 모델 중에 제일 잘생기고 잘나간다는 강동원이 누군지 잘 모르기도 했지만 귀여니라니, 귀여니라니! 당시 “ㅎㅓ걱… ㄸl용… ㅇ_ㅇ…”이나 “꺄악!!!!!!>_<!!!!!!!!!!몰라 난 몰라 >_<” 따위 한글 파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금의 현실을 한탄해 마지않던 나에게 그 이름은 한국 문학계의 이완용과도 같았다.
결론을 얘기하겠다. 친구 손에 이끌려 <늑대의 유혹>을 보러 갔던 나는 노란 우산 아래서 태성(강동원)이 한경(이청아)을 향해 미소 짓던 순간 극장을 가득 메운 여고생들과 한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태성이 교복 자락을 휘날리며 교실 창문을 뛰어넘을 때 눈이 하트가 되었으며, 며칠 뒤에 다시 보러 갔다. 강동원이 굉장히 좋은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나는 그를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으로 <늑대의 유혹>을 꼽는다. 그리고 귀여니는, 시대의 트렌드세터였다.
tvN <꽃미남 라면가게>는 여러모로 <늑대의 유혹>, 엄밀히 말해 ‘귀여니 월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딱히 예쁘지도 내세울 것도 없는 스물다섯살의 임용고시 준비생 겸 체육교생 양은비(이청아)를 둘러싸고 굴지의 식품회사 사장 외아들인 꽃미남 차치수(정일우)와 훈남 천재 셰프 최강혁(이기우)이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어리바리하면서도 욱하는 성질 때문에 가는 곳마다 ‘일진’이나 ‘완벽남’과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그 잘난 남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팔자 좋은 여주인공의 허황된 신데렐라 스토리는 솔직히 이제 너무 진부하고 유치하지 않나? …라고,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는 생각했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와 <로망스>와 <고쿠센> 심지어 <넌 내게 반했어>까지 온갖 학원청춘 로맨스 판타지의 클리셰만 다 모아놓은 것 같은 <꽃미남 라면가게>는 의외로 참신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돈 많고 싸가지없다는 점에서는 낯이 익은데 도피 유학에서 멋대로 돌아와 “영어로 햄버거 시켜먹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영어를 쓰래, 읽으래, 공부까지 하래!”라고 울부짖으며 아버지(주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징징대는 차치수의 캐릭터는 한심해서 사랑스럽다.
그래서 차치수가 부친상을 당한 양은비에게 실실대며 조의금 봉투를 내밀고, 가난한 친구더러 “너 과장일 때 나 사장이고 너 전세 살 때 나 별장 얻는다고” 따위 재수없는 대사를 내뱉는 장면조차 불편하기보다 그저 웃긴 것은 이 캐릭터가 철저히 ‘멍충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익스큐즈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맙다, 그런 말은 됐어. 내 먹이한테 딴 놈들이 손대는 거 싫어서 그런 거니까”처럼 맨 정신으로는 차마 내뱉지 못할 궁극의 허세 대사나 “마음 같은 거, 세상에서 제일 쉬운 거야” 등 중학생의 미니홈피 문구로 유행할 만한 명대사의 향연 역시 장르의 공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과장한 코미디로 기능한다. 그러니, 무엇이든 보기도 전에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특히 ‘꽃미남’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면, 일단 한번쯤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간 내가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