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주원] 느리게 걷는 소년
2011-12-01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특수본>으로 스크린 데뷔한 주원

예상이 빗나갔다. 입을 꾹 다물고 과묵하게 등장할 줄 알았더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무려 “안뇽!”이란다. <특수본>의 김호룡이 품었던 서늘한 복수심은 이미 오래전에 빠져나간 듯 생글생글한 눈매였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무표정이나 무서운 표정이 더 어울릴 줄 알았는데…”라며 뒤끝을 흐렸더니 곧장 말꼬리를 잡아채며 “깨요? 이런 거 좋아! 누군가에게 충격을 준 것 같아서”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배실 웃어 보인다. 이 의외의 캐릭터 옆에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 <특수본>의 김호룡, <오작교 형제들>의 황태희를 모두 갖다대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면 그가 아침저녁으로 출석 도장 찍는 트위터를 확인해보길 권한다. 11월23일, “상쾌해 몸이!!!! 전혀 곤피곤피하지 않아!!” 그는 오늘도 느낌표를 남발하며 하이텐션으로 하루를 시작한 모양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대중을 상대로 온몸으로 인정투쟁을 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재롱도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진지해지지는 말아야겠다. ‘곤피곤피’를 다시 떠올릴 것. “좋게 봐주시면 재롱이고 나쁘게 보면 미친놈이겠죠.” 그는 또 아무렇지 않게 앞에 놓인 블루베리 셰이크를 쭉 빨아들였다.

“계획 같은 거 안 세워요”

인생의 쓴맛이 뭔지 아는 남자배우라기보다는 인생의 단맛에 폭 빠진 소년배우 주원의 이력은 아직 열 손가락 안에 다 들어올 정도다. 2007년에 뮤지컬 <알타보이즈>로 데뷔해 2008년에는 역시 뮤지컬인 <싱글즈>와 <그리스>, 2009년에도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 위에서 놀았다. 그러다 2010년 느릿한 걸음으로 TV드라마에 발을 들여놓는가 싶더니 2011년에는 성큼성큼 스크린까지 진입했다. 그렇게 그의 필모그래피에 <제빵왕 김탁구> <특수본> <오작교 형제들>이 추가되었다. 시간을 더 뒤로 돌려보자면 그는 중학교 3학년에 소심한 성격을 극복해보고자 연극반에 든 후로 계원예고를 거쳐 지금의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무던한 행보를 거쳐 배우의 길에까지 오른 셈이다. 데뷔도 그저 물 흐르듯이 진행된 일이었다. “연기학과 1학년 때 극장청소를 많이 하잖아요. 시간관념이 철저한 편이라 선배들이 8시까지 오라고 하면 7시까지 갔거든요. 혼자 흥얼대며 기다렸죠. 그걸 뮤지컬 하고 계시던 선배가 듣고는 오디션에 넣어주신 거예요.”

괜히 무리하지 않는 성격의 그는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애쓰는 대신에 하다보면 무언가가 나오려니 기다리는 쪽이었다. 주어진 틀에 얽매이는 건 특히 더 원치 않았다. “전 계획 같은 거 안 세워요. 뮤지컬 하면서도 반드시 드라마나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다음 작품으로 뮤지컬이 들어왔다면 뮤지컬을, 영화가 들어왔다면 영화를 했을 성격이에요.” 이 물렁물렁해 보이는 태도에 실은 단단한 심지가 숨어 있었다. “소속사 오디션을 쫓아다니기는 싫더라고요. 약자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회사가 절 찾아오면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는데. 배우는 상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줄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맞는 것 같아요.” 대할 바는 못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 아래 같이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자니 대뜸 “그렇죠?” 하며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이며 되묻는다. 자신이 누구인가 알아맞히기 위한 스무고개를 훌쩍훌쩍 뛰어넘는 품새로 보건대 그는 벌써 인생의 스무고개를 넘는 법을 알고 있는 배우가 아닐까.

잘하고 싶은 욕심과 잘되고 싶은 야욕을 구분할 줄 아는 그는 육상선수로 치면 100m 주자가 아니라 마라토너에 가까울 것이다. 길게 보고 천천히 달리기. 실제로도 장거리 수영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다고 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차분해져요. 스무 바퀴 돌고 쉬고, 스무 바퀴 돌고 쉬는데, 그러려면 아주 천천히 돌아야 돼요. 빨리 돌면 금방 힘이 빠지니까. 그러면서 오늘의 하루는 또 어떻게 보냈나, 되돌아보는 거죠.” 숨고르기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그는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을 떠나보낼 때도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천성에 없는 악역을, 그것도 비운의 악역을 연기하다보니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던 탓이다. 그는 “착한 역할이 편해요”라며 입을 쌜쭉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구마준에게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대본 읽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준이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너무 불쌍한 거예요. 제가 아껴주고 싶었어요. 30회 끝날 때까지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러고 나니 뭘 해도 마준이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겨울 내내 오디션도 안 보고 쉬었어요.” 그렇게 그는 구마준의 보호막으로 잠깐 살다가길 바랐던 마음을 더디게 털어냈다.

복잡한 애늙은이?

그 다음이 <특수본>이었다. 이번엔 내면적으로 침잠하기보다 외면적으로 발산하려고 노력한 듯 보였다. 김호룡의 머리만 봐도 그랬다. 짧지 않은 머리를 한껏 위로 치켜세운 모양새가 특별수사본부 내 별종치고도 별종스러웠다. “전 못 느꼈는데 그 머리가 생각보다 파격적인가봐요. 파트너인 태웅이 형보다 너무 어려 보여서 이마를 까봤는데 노안효과가 확실하더라고요. 어플로 테스트도 해봤어요. 머리를 내리면 스물넷, 올리면 서른셋.” 농담 섞인 말로 그는 외모 변신보다 연기 변신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가끔씩 주어지는 액션에 몸은 즐거웠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뒤쫓는 눈빛은 또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파트너 성범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동(動)이었다면 호룡은 정(靜)이었다. 그에게 허락된 동선의 폭 역시 넓지 않았다. 성범이 ‘딸라이 파’를 쫓아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성범은 얼굴의 온 근육을 팽창시키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호룡은 입꼬리를 올리는 데만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어려웠어요. 속으로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도 겉으로는 티가 안 나는 인물이잖아요. 그렇게 보이려고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볼까, 아니면 생각은 많이 하면서 표정만 무표정을 유지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그렇게 블루베리 셰이크가 바닥을 보일 때쯤 머릿속이 복잡한 애늙은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에게 유독 원숙한 배역들이 맡겨진 이유가 있었다. 김호룡도 계란 한판을 꽉 채우고도 남은 나이였고, 심지어 <오작교 형제들>에서 그의 ‘썸녀’ 백자은도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제야 깨달았는데 백일섭 선생님도 창식 아저씨, 저도 태희 아저씨로 불리고 있더라고요.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동안을 되찾아야겠다며 웃는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였다. 차라리 즐거워했다. “선생님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 체험의 폭도 훨씬 커지고 저에겐 좋은 일이죠. 선생님들하고 있으면 편해요. 확 기댈 수 있으니까. 제가 우는 신이 있을 때는 앞에 선생님 대사만 듣고 있어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자신이 나오지 않는 장면도 빠지지 않고 지켜본다는 그는 ‘선생님’들의 경지를 우러러봤다. 연륜이 가져다주는 여유와 자유를 동경해서다.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대사 외우고 감정 짚어내고 호흡 체크하느라 정신없거든요. 제대로 즐기진 못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오래 걸리겠지만 선생님들처럼 즐기고 싶어요. 이순재 선생님이 아직 여든이 안되셨죠? 여든 정도 되면 저도 즐길 수 있을지 궁금해요.” 여든이라니, 너무 멀다. 느리게 걷는 소년, 그리고 아마도 완만한 속도로 성장해갈 소년의 서른이 먼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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