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를 보고 나오는 길, 벌거벗은 임금님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영화에 내려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는 꽤 화려하고 묵직한 용포와 왕관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본 건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드라이브>는 관객의 뇌 주름 사이사이 잠자고 있던 각자의 영화적 기억들을 깨워내는 데는 꽤 충실하다.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핀 같은 성냥개비를 뽑고 돌진하던 홍콩영화의 비장한 영웅들이, 순진무구한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피바다로 뛰어든 한국과 프랑스 ‘아저씨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폭력의 역사>를 거쳐온 두 이름의 남자가 <올드보이>의 장도리를 들고 타란티노적 폭력과 피의 향연을 펼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 위로 스티브 매퀸,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드 니로, 라이언 오닐, 알랭 들롱 같은 이름이 스쳐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외에도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방식으로 호령된 수많은 기억들은 그저 팝업처럼 튀어나오고 연기처럼 시야를 흐리게 만든 뒤 허무하게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제아무리 근사한 O.S.T로 포장한다 해도 낡아빠진 이야기와 게으른 구성 속에 차마 누적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은 결코 영화의 살을 붙이는 아교도, 기반을 견고하게 만드는 벽돌도 되지 못한다. 그나마 머릿속 기억과의 결합을 이뤄낸 영화광들은 러닝타임 내내 그 재회의 기쁨에 홀려 하나라도 놓칠까 흥분하겠지만, 애초에 기억과 향수가 부재한 자들이나 그럴 의지가 없던 관객은 칸영화제가 감독상으로, 평단이 엄지손가락을 올려 찬사를 보냈던 이 영화와의 도킹에 나만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리둥절함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쾌감이면 다 되나
잠자는 사자, 아니 전갈이 있다. 한때 독을 뿜었던 그의 공격성은 이제 점퍼의 문양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잠자는 전갈의 코털을 건드린다. 여기서 <드라이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누구와도 크게 가깝지 않게 단독자로서 살아오다가 옆집 여자 때문에 우연치 않게 사건의 중심부로 끌려나오게 된 남자는 결국 숨겨온 정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잔혹 무도한 폭력의 전시로 유추하건대 남자의 귀환은 선량한 시민을 구하는 보안관의 등장이 아니라 숨어 있던 악당의 커밍아웃이다. 진가신의 <무협>의 진시(견자단)처럼, 과거를 씻은 채 조용히 살아가던 남자들에게 세상은 늘 시비를 걸어왔다. 하지만 진시의 은둔은 타고난 악한 본성을 환경으로 누를 수 있다는 한 인간의 간절한 의지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드라이버>의 그 남자는 무엇 때문에 자동차 정비소에 숨어 있는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남자는 왜 여자의 남편을 돕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눈빛을 나누고 잠깐의 일탈로 마음을 나누고 손 한번 잡은 게 고작인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이 과거가 없는 남자의 돌발적 선택을 연정과 순애보로 해석하기엔 미심쩍다. 만약 남자가 정말 여자를 목숨을 던질 만큼 아끼고 사랑했다면 그녀의 눈앞에서 아마도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그런 과시적 폭력을 휘두를 순 없을 것이다. 결국 남자의 이어진 행위는 복수도 응징도 아닌 대상없는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남편이 죽고 악당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녀는 과연 행복하고 안전한가.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팔자기에 남편이 죽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불운도 모자라 마음을 나눈 남자의 악마 같은 본성까지 목격하게 되는가.
영화의 제목은 ‘드라이버’(Driver)가 아니라 ‘드라이브’(Drive)다. 그 운전은 천편일률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빠른 속도감을 따라가진 않는다. 이미 그런 기대는 쾌속질주를 예상했던 첫 시퀀스에서 깨진다. 남자는 숨 막히는 레이싱 실력으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닥치고 드라이브’ 대신 기다림과 질주를 조절하는 빠른 판단력과 LA의 도로 환경과 지형지물을 미리 파악한 주도면밀함, 경찰 무전을 도청한 정보를 기반으로 핸들을 움직인다. 미치광이 드라이버가 아니라 인공지능으로 운전하는 기막히는 내비게이션에 가깝다. 여기서 오해와 의문은 조금 풀린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관객에게 ‘운전사’를 이해시키기보다는, 자신이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운전’ 실력을 보여줄지에 방점을 찍는다. 주인공에게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제외하고 인물의 내면으로 다가갈 어떤 드라마도 허락하지 않는 식이다. 이 남자에게는 어떤 인간적인 갈등도, 주저함도 없다. ‘옆집 사는 여자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데이트를 신청할까 말까?’ ‘그 여자에게 감옥에 간 남편이 있다는데 계속 좋아해도 될까?’ ‘젠장, 이렇게 빨리 출소하다니! 게다가 그 빌어먹을 남편 때문에 여자랑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줘야 하나?’ ‘아! 이제 직업도 돈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지?’ 따위의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시동이 걸리면 달릴 뿐이고 총이 있으면 쏘고,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머리통을 부수어버리면 될 뿐이다.
수치심은 필요없습니까
결국 인물의 분명한 동기나 행동의 발화점을 상실한 <드라이브>의 남자 캐릭터는 SF로 해석한다면 차라리 편해진다. 이름도, 가족도, 삶의 단서도, 과거도 없는 남자. 그 남자는 기계다. 그것도 상당히 운전을 잘하는 어떤 기계. 선한 세상에 포함된 종족들, 예를 들어 여자와 아이 같은 1번 대상을 향해서는 A형 행동과 얼굴을, 나쁜 세상에 포함된 종족들, 예를 들어 갱들과 돈 가진 자들 같은 2번 대상을 향해선 B형 행동과 얼굴을 보여주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입에 박힌 이쑤시개가 마치 모드 전환을 위한 ‘ON/OFF’ 버튼처럼 작동하는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향해 로맨틱한 키스를 퍼붓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 여자가 보는 앞에서 적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짓이겨 박살내는 모습을 보여도 상관없는 것이다. 여자의 남편이 얻어맞고 피 흘리는 모습을 목격한 아들에게 “엄마에게는 말하지 마”라고 주의를 주던 것과 달리 남자는 폭력을 행하는 것에도 당하는 것에도 어떠한 수치심을 가지지 않는다. 수치심은 인간의 고유한 성질이다.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제목은 ‘드라이버’가 아니라 ‘드라이브’다. 물론 라이언 고슬링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니다. 그는 자칫 로봇으로 머물렀을 주인공에게 잠시나마 인간적인 기운을 불어넣으면서 이 영화의 퀄리티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제아무리 라이언 고슬링 같은 매력적인 운전사 옆이라고 해도 그것이 즐거운 운행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글은 싸구려 햄버거에 올려진 어울리지 않는 유럽식 소스도,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풍 포장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시종일관 울려퍼지는 미치도록 멋진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당신에게 그 햄버거는 정말 맛있었나?”를 묻고 싶을 뿐이다. 나는 정말 맛이 없었다. 이왕 자동차를 타고 정크푸드를 즐기겠다면 차라리 맥-드라이브에 들르겠다. 그 편이 훨씬 빠르고, 더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