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어처구니없지만 숭고한 어떤 운동
2011-12-08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야구를 모르는 눈으로 본 <머니볼>의 감동에 대하여

<머니볼>을 보았다. 나는 야구를 잘 모르는 여자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면, ‘출루율’이라는 말을 이 영화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몇할 몇푼 몇리로 설명되는 타율도, 실은 지금까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올해, 이상하게도 롯데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냥 경기를 틀어놓고 다른 잡일들을 한 적이 많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두해서 본 적은 없지만, 양준혁이 격앙된 목소리로 “야구는 이런 거지요!”라고 외치기 직전마다, 내가 어느새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팽팽하게 동점을 유지하던 경기가 누군가의 홈런 한방으로 뒤집어지거나 하는 승부수가 시합이 다 끝날 무렵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목격하고 양준혁은 언제나 그 뒤에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게, 그게 야구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축구나 농구나 배구에 대고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은, 적어도 내게는 없다. 물론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 수 있다. 공격의 기회를 빼앗는 몸싸움 자체가 경기의 과정인 다른 구기 종목들과 달리 공격과 수비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채 시작되는 야구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뿌듯한 표정으로 “역시, 야구란 그런 거지”라고 할 때, 그 말이 그저 예기치 못한 홈런의 감동, 언제든 가능한 역전의 기회만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 거기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롯데는 졌고, 이상하게도 이후의 결승경기는 뭔지 모르게 뻔해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영화를 본 것이다. 경기의 룰을 더 잘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선수들의 실력을 알아보는 눈이 생긴 것도 아니지만, 이제 나도 조심스럽게 “야구란 그런 거지?”라고 물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서두가 길었다. 야구를 모르는 여자가 <머니볼>에 감동한 이유, 지금 나는 그런 잡담이 하고 싶다.

공이 떠난 자리에서 인간은…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단 한순간을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다. 타구단의 포수였던, 그러나 팔꿈치 부상을 입고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선수 스캇 해티버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출루율이 높은 그를 팀의 1루수로 영입한다. 그러나 빌리의 선택을 신뢰하지 않는 감독은 해티를 번번이 기용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머니볼 이론 덕에, 놀랍게도 19연승을 이루었고, 이제 영광의 20연승을 남겨두고 있는 때였다. 그 경기도 상대팀을 11:0으로 따돌리며 쉽게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다 잡아둔 것처럼 보이던 그 순간, 그야말로 야구에서나 가능할 일이 벌어진다. 상대팀이 단숨에 11점을 따라잡아 동점이 된 것이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해티는 드디어 타석에 오를 기회를 잡는다. 이제는 다 부서졌다고 여겨진 팔로, 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간절히 바랐을 홈런을 터뜨린다. 팀은 20연승에 이른다. 해티의 홈런은 야구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눈물겹고 짜릿한 보너스다. 하지만 그것이 <머니볼>이 하고 싶은 이야기, 아니, 야구만의 ‘그런 것’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싱겁다.

감동적인 장면은 영화의 후반에 따로 있다. 20연승을 이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진 뒤, 빌리 빈은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이 사실을, 20연승을 함께 이룬 부단장 피터 브랜드(조나 힐)에게 의논한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피터는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경기가 담긴 비디오 하나를 꺼낸다. 녹화된 화면 속에는 좀 둔해 보이는, 몸집이 큰 한 선수가 타석에 올라 있다. 피터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선수는 2루까지 가기를 늘 겁내던 사람인데, 이날따라 공을 치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 1루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게 의지였는지, 몸의 반동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몸이 결국 도달한 곳은 2루 베이스도, 1루와 2루 사이도 아니다. 어리석게도 1루를 지나자마자 넘어진 남자는 우스꽝스럽게 기어서 기어이 1루 베이스로 돌아오고 있다. 동료들의 이상한 눈빛에 그제야 주위를 본 남자는 자신이 홈런을 쳤다는 걸 알게 된다. 피터는 이 일화가 빌리 빈과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유라고 말해준다. 네가 이룩한 대단한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움츠러들지 말라는 비유일까? 너의 가능성을 폄하하지 말라는 비유일까? 좋은 동료인 피터의 맥락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빌리는 별 대답 없이 묘한 표정으로 “이래서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라고 말한다. 홈런을 치고도 1루 베이스를 움켜쥔 선수의 모습에 울컥하는 나는 아무래도 피터보다는 이 장면을 대하는 빌리 빈의 마음을 알고 싶다.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아는 게 있다. 홈런을 쳐본 타자라면, 그 공이 담장을 넘어갈지는 공을 친 순간 어느 정도는 감각적으로 알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친 공의 행로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베이스를 돈다. 내가 본 그 누구도 전력질주를 하던 중, 자신의 홈런을 알아채는 경우는 없었다. 어느 날인가, 야구를 잘 아는 친구에게 이대호는 저렇게 체격이 커서 잘 뛰지 못하겠다는 걱정을 무식하게 늘어놓자, 친구는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괜찮아, 이대호는 홈런을 치니까.” 야구가 인간이 공과 경쟁하는 유일한 스포츠라는 누군가의 말을 따른다면, 이대호는 경쟁을 시작하자마자, 공을 이겨버리는 선수다. 하지만 위의 저 2군 선수는 경쟁을 시작하자마자, 경쟁의 루트를 벗어나버린다. 그는 공을 때린 순간, 무모하게도 공을 볼 생각도 않고 뛰기 시작한다. 그에겐 홈런의 경험이 없을 것이며, 베이스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공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만 선수가 자신의 운동을 멈춰야 할 장소를 알 수 있는 야구에서, 이 남자의 태도는 공에 대한 장악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자의 한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이 우스운 장면을 돌이킬 때마다 나는 감정적으로 동요된다. 지금으로서 내게 야구란 ‘그런 것’인가. 남자가 가까스로 1루 베이스를 터치하고 뒤늦게 홈런의 함성을 듣는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야구라는 신비로운 활동의 비밀을 훔쳐본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1루에 쓰러진 어리석은 남자의 몸부림만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우리가 공은 공의 운동을 지속하고, 남자는 남자의 운동을 지속하는 두 운동의 시간 안에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어떻게든 다음 베이스로 가야겠다는 남자의 간절한 마음이 빚어낸 운동, 그리고 그 마음과 관계없이 배트에 부딪힌 순간 자신의 운명을 따르는 공의 운동. 공과 인간이 경쟁하는 것도,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이기거나 지는 것도, 속하는 것도 아니라, 서로 단 한번 마주치고 나서 헤어져 묘하게 병존하는, 그저 각자의 최선을 다한 운동. 이 남자가 1루에서 뒤뚱거리다 엎어질 때, 그것은 2루로 가지 못하고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결과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다. 공의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달리기 시작한 남자는 분명 노련한 선수는 아니지만, 그때, 우리는 공의 운동과 상관없이, 공이 떠난 자리에서 인간이 창피함과 외로움을 무릅쓰고 즉각적으로 행동을 선택해야만 하는 야구의 어떤 세계를 본다.

야구의 예술성

부상을 딛고서 마침내 홈런을 친 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공의 동선에 도취된 해티의 표정은 분명 영웅적이다. 드디어 그는 공을 저 멀리로 움직였다. 반면 똑같은 홈런을 쳤으나 공의 행로가 정해지기도 전에 자신의 운동을 먼저 결정한 저 이름없는 마이너리그 선수의 행동은 희극적이다. 공을 때린 건 그이지만, 저 우아한 공의 동선이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왠지 어렵다. 전자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포츠의 기적이 있고, 후자에는 야구의 운동성이 있다. 조금 과장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자에 스포츠의 감동적인 내용이 있다면, 후자에는 야구의 절절한 형식이 있다. 나는 결국 잠재된 역량을 폭발한 어느 선수의 성취나, 기적의 드라마보다, 야구라는 운동성이 공과 인간의 신체 각각을 통과하는 이 후자의 순간에 두근거림을 느낀다. 그 순간의 감흥은 한 개별 인간의 신체적 조건이나 능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문득 롯데의 광팬인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가 특정 팀을 비난하면서 이기는 야구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거듭 강조할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 장면을 보고 나서 조금은 알 것 같다. 이기는 야구는 경쟁에서 점수를 내주지 않으려는 야구지만, 재밌는 야구는 이 형식의 아름다움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할 줄 아는 야구다.

만약 저 마이너리그 선수의 홈런 장면이 빌리 빈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건 그가 아마도 그 순간에 활동하는 야구의 형식, 야구라는 종목에서만 가능한, 어처구니없지만 숭고한 어떤 운동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믿는 것은 개별 선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숫자로 환원된 야구다. 아니, 숫자로 환원한 야구를 그라운드 위, 물질의 운동성을 통해 야구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개별 인간의 유려한 신체적 미학 대신, A가 안되면 A′ 그도 안되면 A″로 대체하며 그 자리에 존재하는 각 물질들의 최선의 운동으로 재구성되는 형식의 미학. 이것이 야구의 본질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빌리 빈에게 이것은 야구의 예술성인 것 같다. 그가 유능한 선수들과 거대 연봉을 제시하는 레드삭스를 거부하고 결국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남기로 결정한 그 내막을 지금도 알 길은 없다. 다만 실패한 선수이자 스포츠 인본주의에 관심이 없는 냉혹한 감독 빌리 빈은 야구의 승패가 자본의 결과도, 육체적 우월함의 결과도, 행운의 결과도 아닌, 철저히 고안된 예술로서의 활동일 수 있음을 여전히 믿었을 것이다. 야구를 잘 모르는 여자인 나는 그 믿음이 참으로 섹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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