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의 변방에서 세상과의 불화를 택했던 예술가, 성적 과잉과 신성모독을 일삼으며 스스로 이단이 되기를 자처했던 인습타파주의자 켄 러셀이 지난 11월27일 세상을 떴다. 향년 84살,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열혈 팬들이라면 지나치게 평범한 죽음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가 만든 영화들은 논쟁적이고 사악했다. 추모기사를 쓴 평론가 토드 매카시는 그에 대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영화계의 대표적인 문화적 반란과 불경함의 대명사였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작업들을 ‘예술적 치기’로 여긴 영화인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평론가 중 하나였던 폴린 카엘은 그의 과잉의 미학에 대해 ‘갑상선기능항진증의 캠프 서커스 단장’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당대의 공기와 무관한 듯 보이는 개인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프리 시네마’에 몸담았던 젊은 동료 ‘앵그리 영맨’ 영국 감독들과 달리 개인과 사회의 관계, 참여를 통한 연대 같은 문제보다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나 욕망 그 자체에 천착했던 것. 전과 후, 그 어떤 계보도 이을 수 없는 독보적인 이단의 필모그래피를 써나갔다. 굳이 그의 ‘한핏줄 감독’들을 찾는다면 위로는 <피핑 탐>(1960)의 마이클 파웰, 아래로는 <카라바지오>(1986)의 데릭 저먼일 것이다. 켄 러셀의 <악령들>(1971)은 단편영화를 만들던 시절의 데릭 저먼이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맡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켄 러셀은 1927년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났다. 영화감독이 되기 이전 해군과 공군에서 복무했고 발레단 댄서, 연극배우,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영화계의 D. H. 로렌스’라 불릴 만큼 도발적인 영화들을 만들었고 실제로 로렌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우먼 인 러브>(1969)는 그의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하나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글렌다 잭슨)을 수상했다. 이후 만든 올더스 헉슬리 원작의 <악령들>은 켄 러셀의 모든 것이 집약된 작품이다. 17세기에 일어났던 실화로 정치적 음모와 탐욕, 지옥으로 변해버린 현실이 신성모독으로 비난받았던 집단 누드와 고문 장면을 통해 악몽처럼 다가온다. 그의 악마적 비주얼 감각이 절정에 달한 작품으로, 성적으로 뒤틀린 곱사등이 수녀를 중심으로 성직자들간의 권력다툼과 마녀사냥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극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1970년대는 켄 러셀의 작품세계가 만개한 전성기였다. 그것은 <뮤직 러버>(1971)의 차이코프스키, <말러>(1974)의 구스타프 말러, <토미>(1975)의 더 후, <발렌티노>(1977)의 루돌프 발렌티노 등 기존의 예술가들을 끌어와 그들의 신화에 자유로운 상상력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가령 <말러>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의 죽음>(1971)에서 말러(더크 보거드가 연기하는 영화 속 캐릭터 이름은 ‘구스타프 아센바흐’)와 미소년의 사랑이 이뤄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도발적인 오마주를 보여줬다. 더 후의 앨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록 오페라 <토미>는 종교의 위선을 공격하는 원작의 메시지에다 타락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더 후’의 창단멤버이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로저 달트리는 <토미>에 출연한 이후 역시 켄 러셀의 <리스토마니아>(1975)에서 주인공 프란츠 리스트를 연기했으며 이후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E.T.>(1982)에 출연하기 전 ‘아기’나 다름없는 드루 배리모어의 데뷔작 <올터드 스테이츠>(1980)와 <크라임 오브 패션>(1984)으로 미국에도 진출한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고딕>(1986), 휴 그랜트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백사의 전설>(1988) 등을 만들며 그 명성을 이어갔다. 1980년대 들어와 영화와 TV를 오가고 오페라 연출에도 손댔던 그는 1983년 <나비부인>을 미국 무대에 올리며 중매인 고로를 매춘굴의 기둥서방으로, 나비부인 초초상을 고로가 데리고 있는 창녀로 묘사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논쟁과 불화를 즐기며 정신병자와 혁신가 사이를 오갔던, 신성불가침의 환각에 빠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단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