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한달 동안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 특별전’이 열린다. 1958년 <결혼의 모든 것>으로 데뷔한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은 2002년 유작 <복수>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을 현역에 종사하며 40여편의 작품을 연출한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전후 일본영화계를 이끌어온 주요 감독 중 한명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편으로 이번이 국내에서 열리는 첫 번째 감독전이다. 국내 소개가 늦은 느낌이 있지만 데뷔작에서 유작까지 대표작을 망라한 총 27편이 소개되는 만큼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의 전모를 감상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특별전이 될 것 같다.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의 영화세계는 몇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장르를 불문하고 발휘되는 시니컬한 유머감각은 공통된 특징이다. 전후세대의 시대감각을 결혼제도라는 틀을 통해 탐문해보는 데뷔작 <결혼의 모든 것>은 신인감독답지 않은 연출 역량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재기 넘치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는 이 영화는 성과 결혼에 대한 젊은이들의 변모된 관념을 주로 보여주면서도 전통적 가치로 봉합된다는 면에서 한국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을 연상시킨다.
발랄한 세태풍자의 묘미가 일품인 대표작 <에부리만씨의 우아한 생활>(1963)은 평범한 36살 샐러리맨의 독백으로 당대 일본사회의 현실과 세대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주인공은 우연히 지면을 얻게 되고 모든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에부리만’을 필명으로 결정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주인공 일가의 삶을 정리한 장면 등에 풍성한 유머감각이 넘친다. 상영목록에는 태평양전쟁 말기를 다룬 전쟁영화, 암흑가의 음모와 대결을 그리는 범죄액션영화, 독특한 필치의 사무라이 시대극이 고루 안배되어 있다.
서부극 관습을 차용해 전쟁말기 지나 전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독립우연대>(1959), 군부에 의해 항복방송 저지 쿠데타가 계획되는 8월15일 풍경을 담은 <일본의 가장 긴 하루>(1967),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학도병의 이야기를 그린 <육탄>(1968) 등의 전쟁영화는 접하기 어려웠던 영화들이라 눈길이 간다.
<암흑가의 보스>(1959), (암흑가의 대결> (1960), <보스의 죽음>(1961) 등의 범죄액션영화는 장동휘, 박노식 주연의 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어 친숙한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아들이 주인공인 <보스의 죽음>은 삼촌과 젊은 새어머니라는 등장인물 자체가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흥미롭다.
<킬>(1968), <자토이치와 요짐보>(1970), <스카타산지로>(1977), 유작 <복수> 등의 사무라이 시대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제목부터가 타란티노의 <킬 빌>과 연결되는 <킬>은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음악과 함께 과장된 비장함으로 시작해 예사롭지 않은 영화라는 걸 대번 알 수 있다. 사무라이 시대가 종말을 고할 무렵, 사무라이 인생에 환멸을 느낀 남자와 농민 반란의 참담한 결과를 보고 농민에서 사무라이로 변신하려는 아이러니한 숙명의 또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외에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드문 장르인 멜로드라마 <어느 날 나는>(1959)과 SF <블루 크리스마스>(1978), 일본 스타가 총출동한 <대보살고개>(1966) 등도 상영된다. 12월17일에는 일본영화 전공인 동국대 알렉산더 잘튼 교수의 강연도 마련되어 있으며 관람은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