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창피해도 괜찮아 사랑은 다 괜찮아
2011-12-13
글 : 이화정
<귀여워> 이후 7년 만에 돌아온 김수현 감독의 신작 <창피해>

<귀여워>의 마술적 리얼리즘, 불균질한 에너지를 기억한다면, 김수현의 두 번째 영화는 응당 기대할 만하다. 뜸들인 듯 오랜 시간을 지나 그가 두 번째 장편 <창피해>로 돌아왔다. 세명의 여자 지우. 한 지우가 지켜보는 두 지우의 사랑 이야기. 퀴어물이라는 포장 아래 그는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 보편적 사랑의 감정 등 모든 걸 헤집고 나간다. <귀여워>의 거친 숨결이 다소 완화됐고 감정의 표현은 한층 유연해졌다.

김수현 감독에게 사전적 정의가 따로 존재한다는 건 애초 <귀여워> 때부터 알아봤다. 황학동 철거촌, 한 여자(순이)를 주축으로 한 부자지간의 아귀다툼, 아니 동상이몽을 얽어놓고서 그는 그 각축전을 감히 ‘귀엽다’라고 한 사람이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는 저마다의 이유로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귀엽다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독특한 시도를 감행했다. 물론 대다수는 이 정의를 외면했다.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고 그 역시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7년이란 세월은 사라졌다라는 표현을 막 쓰기 시작해도 좋을 타이밍처럼 보였다. 그의 작품을 온전히 지배하고도 남았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평단의 놀람이 무색해질 즈음, 그의 두 번째 작품 소식이 들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출품작 <창피해>.

창피해. 뭐가? 첫 작품이 불러온 심리적, 도덕적 반감, 이해 못할 코드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반영된 걸까? 그렇다고 해도 신작 감독의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뉴커런츠 부문 초청은 불공평해 보였다. 그는 발굴이 아니라 이미 평가를 받은 감독이 아니던가. ‘귀여워’와 대구를 염두에 둔 것 같은 제목 때문에 짐짓 연작에 대한 가능성도 점쳐졌다. 예상과 달리 <창피해>는 <귀여워>에 대한 어떤 반추로 등장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귀여워>의 순이가 남성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여성이었다면, 이제 그는 여성을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뚝 떨어뜨려놓고 조목조목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걸 레즈비언이라고 불러도 좋고,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고 불러도 좋다. 그건 이야기의 시작일 뿐,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랑, 그 느낌을 표현하는 한마디

<창피해>의 ‘창피해’는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여 속내를 들킬까 걱정이 되는 단계. ‘너와 나는 들숨과 날숨이 똑같아’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한 순간. 그리고 내 감정을 간파당할 위험에도 ‘창피할 것 없는 거죠?’라고 말할 정도의 민망함. 그 사랑의 감정이 바로 ‘창피해’다.

백화점에서 VIP 고객관리를 하는 윤지우(김효진). 일상이 무료한 그녀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일탈을 시도한다.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힌 마네킹을 한번 옥상에서 떨어뜨려보는 건데, 만약 자신이 자살할 경우의 느낌을 알아보자는 심산이다. 공교롭게도 마네킹이 떨어진 곳은 소매치기 강지우(김꽃비)가 타고 있던 차였고, 강지우는 그때 경찰(최민용)에게 쫓기던 처지였다. 보통의 구도라면 이 상황에서 경찰과 두 여자의 삼각관계를 염두에 두는 게 마땅하겠지만, 화살의 방향은 두 여자 서로에게 가 닿아 있다. 자살 시도로 물의를 일으킨 지우와 소매치기로 검거된 지우, 두 지우는 하나의 수갑에 채워져 있고 둘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의 현재는 그로부터 2년 뒤, 두 지우의 사랑이 이미 끝난 시점이다. 제자 희진(서현진)이 그린 그림 속 윤지우를 본 교수 정지우(김상현)는 지우를 누드모델로 발탁하고, 함께 전시용 비디오 작업을 위해 바다로 갈 것을 권유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두 지우의 만남과 아픈 이별까지의 과정을 듣는다. 영화의 순서상으로 보자면, 교수 정지우와 희진의 장면이 먼저, 두 지우의 만남이 그 뒤에 불쑥불쑥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차지하고 나오는 식이다.

윤지우와 강지우의 사랑은 이른바 번개처럼 시작됐다. 부자지간에 한 여자를 차지하려 했던 <귀여워>가 설정만 놓고 볼 때 통속적이었던 것만큼, <창피해> 역시 극적이고 우연한 첫 만남으로 따져본다면 여느 일일연속극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물론 발단과 달리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방식은 예상 밖이다. 지우는 길거리에서 만난 희진과 그 친구들에게 “니들, 나 이타적 유전자다!”라고 말하는데, 선언인지 아님 독백인지 모를 그 문장이 그녀의 지난 2년간의 사랑이 남기고 간 정의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 이기적 유전자를 계승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성애자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과 달리, 종족의 보존보다는 나 이외의 것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향을 가진 자들’, 즉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럼에도 둘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 동성애적 사랑이 사회에 가져온 파장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필요는 없다. ‘남자에게 열리지 않던’ 그녀가 강지우에게 성적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갔던 시작부터 함께했던 사랑의 순간들,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꿈꿨던 윤지우를 부담스러워했던 상대 지우의 변심까지, 조목조목 따져보아도 이 사랑은 어디까지나 익히 보아왔던 이성간의 사랑으로 읽어도 무방한 전개처럼 보인다.

동성애영화일까, 아닐까?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은 퀴어물이라는 체에 굳이 걸러야 할까 싶을 정도로 보인다. 그래서 두 지우의 섹스장면 수위 역시 다소 침착해 보인다. 오히려 그 둘의 결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건 수갑으로 얽혀 있던 전반부의 리듬감이다. 한명이 가면 다른 한명이 따라갈 수밖에 없게 몸이 묶인 상태. 강한 어느 한쪽(강지우)이 나약한 쪽, 혹은 더 애정을 표한 쪽(윤지우)을 끌어가는 구도가 성립된다. 이 경우 몸에 전달되는 파장은 여느 육체적 묘사보다 클 수밖에 없다. 한쪽이 묶여 있는 동안 다른 한쪽은 샤워를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 다른 한쪽이고, 이 미묘한 떨림은 금속의 수갑을 통해 똑똑 상대의 심장을 노크하게 만든다. 결속과 이탈의 묘한 줄타기를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갑은 두 지우의 사랑의 결정적 매개체로 자리한다.

<창피해>가 공을 들이는 건 결국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다. 문제는 <귀여워>에서도 익히 보아왔듯이 이 과거가 정갈한 스토리라인을 형성한 채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들끼리는 어떻게 밟을까”가 늘 궁금했다던 교수는 액자의 바깥에서 두 지우가 거쳤던 사랑의 파국을 지켜본다. 윤지우가 ‘여자들끼리’의 사랑을 하나둘 꺼내놓는 방식은 단편적이고 정리되지 않은 어떤 기억의 조각들이다. 과거는 순수하게 한 덩어리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윤지우에게 과거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떤 파편들이고, 영화에서 ‘회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그래서 좁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신 그걸 상쇄하기 위해 과거를 바라보는 다종다양한 방식이 마련되는데, 예를 들면 강지우가 소매치기하던 시절을 회상할 땐 마치 영사실의 필름이 돌아가는 듯한 사운드와 비주얼적 느낌을 살린다든가, 윤지우가 엄마에게 가졌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설명할 땐, 강지우가 그 과거의 장소로 택시를 타고 가서 엄마와 윤지우를 지켜보는 식이다.

한층 유연해진 김수현의 감성

판타스틱한 이 기억들을 담아낼 현재는 바닷가와 선착장, 기차역 같은 곳이다. 로드무비의 틀거리 안에서 윤지우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둘 재구성한다. 내성적이지만, ‘빨간머리 앤’을 연상시킬 정도로 몽상가적인 기질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윤지우는 강지우와의 사랑을 겪으며 부쩍 변화했다. 끝까지 강지우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던 윤지우가 마침내 “알았어. 갈게!” 하고 돌아서는 선언의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지키던 ‘창피하고 설레고 간질간질했던’ 사랑의 마법은 일순간 풀려버렸다. 마침내 사랑을 믿는 데 인색했던 상대 강지우를 일정 부분 닮으면서 윤지우는 성장이라는 또 다른 키워드를 얻게 된다. 물속에서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던 윤지우는 결국, 그 성장을 위해 알을 깨는 고통의 순간을 지나온 그녀 자신의 형상화다. 사랑에 흠뻑 빠졌던 과거의 지우,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보는 현재의 지우. 어쩌면 두 여자 같은 한 여자의 감정을 조율한 김효진의 연기가 이 변화의 지점에서 반짝 빛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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