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세월은 다르게 각인된다. ‘어른’들에게 세월은, ‘아이’의 나이 듦으로 인식된다. 2000년 입사 당시 <씨네21> 기자직 신입사원 중 역대 최연소였던 24살 고졸 여사원 이다혜를 처음부터 봐왔던 선배들은 아주 오랫동안 “넌 아직도 서른살이 안됐냐?”며 웃었고 그 뒤로는 “어느새 너도 내일모레 마흔이란 말이냐”라며 한탄한다. 내게 세월은 이렇게 각인된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만난 하늘 같은 선배들, 거의 모든 영화를 알았고, 글을 잘 썼고, 모르는 사람이 없던 그 선배들과 내가 처음 만났던 때, 그들은 젊었으며 지금 내 나이 또래에 불과했구나 하고. <한겨레>와 <씨네21> 기자였던 임범의 <내가 만난 술꾼>을 읽으면서 그들과 처음 만났던 때 다들 참 젊었구나 깨달았다. 이 책은 임범 자신에게 무척 개인적인 추억의 모음이고, 서문에 쓴 것처럼 ‘살아 있는 지인들의 조사를 쓰는 일’이겠지만,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들 공유하고 있을 어떤 시간의 기록이다.
밤은 젊었고 임범도 젊었다. 뭐,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그 젊은 밤에는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나는 그와 술을 가장 안 마시는 후배 축에 속했는데도 그랬다. 나조차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 중 절반이 넘는 이들과 술자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 게임, 사연, 얼굴들 속에서 나는 지난 11년의 부스러기들을 발견했다. 이 책이 잘 팔릴지는 모르겠다. 홍상수, 공지영, 정진영, 장선우, 성석제와 술을 마셔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라면 꽤 즐거운 독서라 느끼겠으나, 총 30여명에 달하는 이 책의 주인공 중 아는 사람이 5명 이하라면 그냥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들 이야기로나 비칠 테니까.
가장 최근에 술꾼 임범과 술잔을 기울인 이야기를 하고 글을 맺도록 하자. <북촌방향> 개봉 직전, 홍상수 감독, 허문영 부산시네마테크 원장, 백은하 ‘텐아시아’ 기자, 정한석 <씨네21> 기자와 술을 마셨다. 그날 3차를 허문영, 정한석과 (이 책에 숱하게 등장하는 술집인) ‘소설’에 갔는데, 예고없이 임범이 등장했다. 이미 취한 얼굴인데 ‘잠들기 위해 딱 한잔 더’ 마시겠다고 혼자 왔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아니나다를까 진지한 얼굴로 폭탄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종래는 (말하자면 긴 사연 때문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학생들과 ‘소설’ 주인인 기정 언니까지 합세해 한 시간 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새벽이 되어 옆자리 청년들은 술값을 다 계산하지도 않고 사라져 우리 테이블에서 돈을 보태 계산을 끝냈고, 임범은 ‘소설’ 단골인 예쁜 언니의 부축을 받으며 어디론가 잽싸게 사라졌다. 아마 그의 좌우명이 있다면 ‘언니와 술’ 아닐까. 언니와 함께 저 멀리 사라지던 임범의 뒷모습을 보며, 뭔 사람이 저렇게 안 변하나 웃었다. 아직 그의 밤은 충분히 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