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뜨고 진다. <어글리 베티>가 한참 인기있을 때,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라틴계 여배우로 샐마 헤이엑이 꼽혔다. 그렇다면 지금은? 시트콤 <모던 패밀리>의 소피아 베르가라다. 콜롬비아 출신인 베르가라는, <모던 패밀리>에서 아버지뻘인 제이 프리쳇의 콜롬비아인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중·장년층 남자가 트로피처럼 얻은 젊고 예쁜 아내) 글로리아로 출연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모던 패밀리>는 여피족 부모와 제멋대로인 아이들로 구성된 핵가족, 게이 부부가 중국 아기를 입양해서 기르는 대안가족, 재혼으로 만난 다문화가족 등 전통적인 가족의 정의와 다른 형태의 가족이 모여 가족간의 사랑, 우애, 신뢰 등 공감의 폭이 넓은 소재를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낸 <ABC>의 인기 TV시리즈다.
성인배우에서부터 아역배우까지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이 프리쳇 가족의 구성원은 출중한 한 사람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고른 앙상블을 보여준다. 캐스트 대부분이 에미상, 배우조합상, 골든글로브상 후보자로 지명되고 수상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그 사실을 방증한다. 그중에서도 소피아 베르가라는 올해 안방극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머프> <해피 피트2> <뉴 이어스 이브> 등 스크린으로까지 활발하게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스크린에서건 TV에서건 소피아 베르가라가 등장하면 시청자의 두 가지 감각은 그녀에게 온전히 빼앗기고 만다. 첫째는 시각이다. 풍만한 가슴과 그에 상응하는 엉덩이를 강조한 옷차림 덕분에, 자기도 모르게 시신경이 그녀의 몸에 집중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둘째는 청각이다. 외모가 주는 거의 모든 이미지를 배반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섹시하거나 혹은 짜증스러운 녹슨 금속 같은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음색보다 더 귀에 감기는 것은 억양이다. 모국어의 억양을 버리지 않고 속사포처럼 영어로 대사를 쏟아내는 통에, 자막 없이는 바로 듣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으로서, 자기 출신을 드러내는 억양으로 당당하게 영어로 말하는 걸 볼 때 무척 부러울 수밖에 없다. 자주 쓰는 표현이야 한번에 찰떡같이 알아듣도록 말할 수 있지만, 가끔 새로운 상황을 설명해야 하거나 뜻밖의 질문에 반응해야 할 때는, 번데기 발음, R 발음, 인토네이션이 모두 행방불명된 순한국식 표기법에 따른 발음이 우물쭈물 새어나온다. 당연히 상대방은 못 알아듣고, 그다음부터는 자신감 상실, 의욕 상실, 목적 상실로 이어지는 수순이다. 한데 소피아 베르가라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와 억양을 고수한다. 할리우드 진출 뒤 1년 반이면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계 배우들 틈에서 단연 도드라진다.
“나는 무서울 것이 없다. 세상은 내게 감당 못할 일들을 안겨주었지만, 언제나처럼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2011년 여름, <퍼레이드>와 인터뷰하며 베르가라가 한 말이다. 17살에 펩시콜라의 광고모델로 데뷔한 뒤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라틴계 여배우로 꼽히는 베르가라는 18살에 결혼, 20살에 출산, 21살에 이혼을 겪었고, 1998년 납치범 손에 오빠를 잃었다. 2000년에는 갑상선암을 진단받고 치료 뒤 완쾌했다. 2011년 약물중독으로 오랫동안 재활 시설을 오가던 남동생이 미국에서 체포되면서 콜롬비아로 추방당했다. 자신감은 오기보다는 성공에서 우러나온다는 선입견을 배반하는 곡절 많은 뒷이야기다. 외모과 목소리 덕분에 실사에서나 애니메이션에서나 아직은 ‘섹시 컨셉’의 타입 캐스팅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지만, 머지않아 이런 전형조차 배반하는 역할로 시청자를 사로잡으리라 기대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