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궁금했다. 한국영화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하나였던 정두홍 무술감독의 얘기를 한동안 들을 수 없었기 때문. 올여름과 가을, 그는 <지.아이.조2: 리탤리에이션>(이하 <지.아이.조2>)에 ‘스톰 쉐도우’ 이병헌의 ‘스턴트 더블’로 참여해 뉴올리언스에서 4개월여 촬영하고 돌아왔다. 내년 여름 개봉예정인 2편에서도 이병헌은 강렬한 액션신을 선보이며 천적인 ‘스네이크 아이즈’와 다시 한번 진검승부를 펼친다. 그렇게 이병헌의 대역을 소화하는 가운데 마셜아츠(무술액션)에 관한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두’로 불리며 마치 초창기 스턴트맨 시절의 활력을 다시 한번 느꼈고 무술감독으로서의 여러 고민도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이미 1편인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 때도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부터 할리우드 영화현장을 체험하고 싶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끝내고 (이)병헌이가 출연을 고민하기에 무조건 가라고 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병헌이가 할리우드에서는 신인의 위치나 다름없다 보니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딱히 매니저 없이 나 혼자 다녀야겠더라. 그런데 나는 영어도 잘 안되고 처음이다 보니 그렇게 하기는 좀 버거웠다. 그래서 혼자 갔다오라고 했다. 먼저 가서 길을 좀 잘 닦아놓으라고. (웃음)
-2편 때는 뭔가 좀 달라진 건가?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스텝 업 3D>(2010) 등을 했던 존 추 감독을 끌어들이면서 본격적인 속편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속편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본 거지. 그리고 병헌이가 1편에서 워낙 잘해서 큰 신임을 얻고 보니 자신의 ‘스턴트 더블’로 나를 쓰겠다는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대우가 많이 다르더라고. (웃음)
-한국을 떠나면서는 어떤 마음이었나.
=딱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갔다. 행복과 공포.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할리우드에서 작업해보는 게 꿈이었으니까 그걸 이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했고, 또 병헌이와 함께 가니 누가 되지 않을까 공포스러웠다. 그런 공포감이 있으니까 잘해냈을 때의 행복감은 더 커졌다.
-하루 일과는 어땠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촬영하는데 촬영이 없으면 계속 훈련이다. 보통 6시에 기상해서 촬영 준비하고 7시쯤 촬영에 들어간다. 그사이 촬영이 없으면 나는 무조건 스턴트 훈련을 하고 병헌이 같은 배우들은 다이얼로그 코치와 함께한다. 그러다 5시쯤 촬영이 끝나면 돌아와 밥 먹고 개인 훈련을 하고 11시나 자정쯤 잠자리에 든다. 물론 밤샘촬영도 있으니까 오후 5시쯤 집합해 밤을 새우기도 한다. 어쨌건 12시간의 개인 휴식시간은 꼭 주어진다. 그렇게 혼자 거의 프리로 다니면서 4개월 동안 병헌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웃음)
-주어진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어떤 건가.
=이병헌의 스턴트 더블이 핵심이고 전체적으로 마셜아츠에 관한 코디네이터 개념으로 보면 된다. 우리는 자동차 스턴트건 와이어건 마셜아츠건 그냥 ‘무술감독’ 하나로 통칭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다 나눠서 관리하니까. 내가 이병헌의 대역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 역시 그 동작을 무조건 연기한다. 나중에 이왕이면 배우 촬영분을 쓰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대역 분량을 넣는다. 한국에서도 대역이 있건 없건 그렇게 배우들이 액션 연기를 기본적으로 다 한다면 감독들이 그 배우를 업고 다닐 거다. (웃음) 그래서 배우가 훈련이나 액션을 게을리할 수 없는데 이병헌의 운동량도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봐도 보디빌더 선발대회에 나가도 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이병헌에 대한 현장의 반응이나 존재감은 어땠나.
=현장의 황태자였다고 보면 된다. 일단 내가 현장에 편하게 갈 수 있었던 것도 병헌이 덕택이니 1편에서 얼마나 잘했겠나. 할리우드나 한국이나 모든 현장에서 다 그렇겠지만 병헌이가 연기할 때 스탭들의 몰입도도 보통 아니었고 모니터 주변에 몰려들어 다들 지켜봤다. 존 추 감독이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현장 분위기는 한국이든 할리우드든 다 마찬가지더라. 예술 하는 사람들은 다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내가 할리우드를 너무 거대한 거인으로 상상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먼저 가서 훈련을 하다가 크랭크인하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겠다.
=훈련하던 공간은 그냥 창고 같은 데여서 ‘이거 뭐 서울액션스쿨이 훨씬 낫잖아’ 그랬는데(웃음) 촬영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정말 어마어마하더라. 일단 뉴올리언스에 있는 촬영 스튜디오가 옛날 나사(NASA)에서 로켓을 만들던 곳이라 공간 자체가 상당했다. 이제 더이상 그곳에서 로켓을 안 만드니까 정책적으로 영화 세트로 개조한 거다. 그냥 거대한 공장 하나가 세트인데, 그 안에 세트로 호텔도 만들고 커피숍도 만든다. 그러니까 호텔이나 커피숍 같은 게 통째로 움직이는 수준이다. 그 안에 모니터가 8, 9개 정도 있는데 카메라가 다 어디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할리우드구나, 했다.
-아무래도 2편부터 갑작스레 참여하게 된 거라 부담감이 컸을 것 같다. 어떻게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었나.
=병헌이의 첫 촬영이 탈출하는 액션장면이었다. 병헌이가 역시 기가 막히게 해냈고 나도 내 분량을 촬영했는데, 실제 고난도의 액션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창피당하지 않게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촬영도 잘 끝냈고 액션장면에서 표정도 좋고 기합도 괜찮았는지 다들 박수를 쳐줬다. 아시아 액션영화들은 확실히 ‘액션은 감정’이라고 칼을 한번 휘둘러도 느낌이 다르다. 그런 것을 보면서 병헌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감독이 나한테 웃으면서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것을 보고 뭔가 좀 되는구나, 싶었다.
-직접 현장을 경험해보니 구체적으로는 한국식 액션 연출이 어떤 점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봤나.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힘들었다. 현장에서 병헌이가 찍어준 내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조는 사진들이다. (웃음) 스톰 쉐도우는 스네이크 아이즈와 붙는 장면들이 많아서 스네이크 아이즈 대역을 했던 제이콥이라는 친구와 많이 친해졌다. 마셜아츠에 관해서는 확실히 우리 한국식 연출이 강점이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쪽에서 격투의 합을 다 만들어주면 난 리허설하고 촬영만 하면 되는데, 가끔 그 합을 내식대로 바꿔서 다시 보여주고 그러면 되게 좋아했다. 조감독이 무서운 양반인데 나랑 병헌이한테 늘 ‘파워풀’하고 ‘에너제틱’하다는 얘기를 했다. 힘든 나머지 남은 힘을 끌어올려 기합을 내지르는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현장에 적응도 되고 스피드도 붙으니까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상대 스턴트맨을 집어던져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눈도 매섭게 변하니까 내 눈도 잘 못 마주치고. 현장에서 ‘두’라고 불렸는데 상대가 보호대를 차도 내 손동작에 아프니까 ‘두! 살살해’ 그러면서 장난도 치고 잘 지냈다.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세트 촬영팀이 구경오기도 하고.
-제일 힘들 때는 언제였나? 역시 아이들 생각이었나.
=와이프보다 애들이 보고 싶어서 미치겠더라. (웃음) 서울액션스쿨 체크도 따로 안 했다. 액션스쿨에서 연락이 와서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봤는데 “내 몸에 칼이 들어와도 고통을 모를 것 같다”고 했다. 너무 긴장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다가도 휴대폰 동영상으로 “아빠, 빨리 와” 그럴 때 눈물이 핑 돌지. 촬영하던 곳이 시골이나 다름없어서 놀러다닐 데도 없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그냥 운동만 계속 했다. 돌아와서 방에서 병헌이랑 같이 <슈퍼스타K> 보고 그러면 훌쩍 새벽 1, 2시가 되곤 했다.
-류승완 감독과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나? 이제 함께 다시 <베를린 파일>을 하게 되는데.
=도 닦는 기분으로 행복과 공포를 안고 가서는 깨달은 게 많다. 나도 모르게 실수한 부분, 노력을 게을리한 부분을 되짚어보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류승완 감독에게 “나 반성 많이 했어. 한국 돌아가서 정말 열심히 할 거야”라고 카카오톡을 보냈다. 그랬더니 “작심삼일이겠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 그래서 3일은 아니고 최소 3년은 갈 거라고 했다. 할리우드에서 느낀 건 확실히 투자가 되니까 세트로 하는 부분이 많다. 가령 벽이나 계단을 실제 장소가 아닌 세트에서 다른 재질로 만들면 충격을 덜 느끼니 훨씬 다양한 스턴트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를린 파일>에 계단장면이 있어서 세트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할 것 같다.
-4개월여의 미국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느낀 게 있다면.
=일단 접근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4개월 동안 촬영하면서 ‘배려’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생각했다. 분업화가 철저히 돼 있다 보니 내 고집을 버리는 것, 다른 팀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나 때문에 피곤하고 고통받았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니까 집착도 버리게 되고 현장이 즐거웠다. 그동안 나와 오랫동안 작업했던 병헌이도 나더러 “형이 그렇게 털털하고 웃긴 사람인지 몰랐어” 그러더라. 젊은 친구들하고 합을 맞추고 의견을 나누면서 확 젊어진 느낌도 들었고. 게다가 내 몸에 애정을 주고 영양분을 주니 몸도 변하더라. 그렇게 호흡을 길게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그 호흡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