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인디라마]
[김영진의 인디라마] 노동의 당당함이 좋아
2012-01-05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미덕과 이물감 공존하는 이성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

이성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는 초반과 끝 장면이 맞물려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샬림이 이제 더이상 촬영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는 데서 시작한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샬림의 인력거꾼으로서의 삶의 연대기와 그의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 다음 초반부에 보여준 그 시점에 다다른다. 아내와 아이들이 병을 앓으면서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이 줄어들자 샬림은 절망한다. 자신의 꿈이 사라지고 있노라고 울먹이던 그는 더이상 자기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카메라를 거부한다. 그 장면에서 갑자기 감독 이성규가 카메라 앞으로 튀어나온다. 그는 파국에 이른 촬영현장에서, 카메라 앞에서 샬림에게 영어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시작한다. 거듭 사과하며 샬림을 껴안는다.

3세계를 바라보는 인습적인 시선 벗어나

연출자가 카메라 앞에 나서는 것은 다큐멘터리에서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니다. 연출자가 화자가 되는 일도 흔하고 종종 카메라 앞에서 피사체인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곧잘 있다. <오래된 인력거>에선 그게 느닷없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라고 거듭 이성규 감독이 샬림에게 말할 때 영화를 보면서 은근히 품었던 의심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소되는 걸 느꼈다. 예를 들어 샬림이 자기 인생의 꿈이라고 말하는 삼륜차를 사는 일의 실현 여부에 관해 생각해보자. 인도의 가난한 최하층 계급 인력거꾼의 삶을 찍는, 부자는 아니겠지만 샬림보다 더 나은 형편의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에 대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 돈으로 800만원의 구입비용이 들고 등록비까지 합하면 1200만원가량이 든다는 샬림의 삼륜차 구입의 꿈은 솔직히 말해 누군가의 도움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이다. 이런 형태의 자선이나 구조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아프리카에 가서 유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번듯한 집을 지어주는 것을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다).

불행에 빠진 대상을 촬영하면서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이들을 찍을 돈으로 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 혹은 이 사람들에게 출연료를 줘 도울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의 가난을 촬영팀이 소재로 착취할 위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감독의 ‘미안하다’라는 화급한 마음의 표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피사체를 상대할 때 맞닥뜨리는 모든 인간적 곤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픽션으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스크린이나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은 흔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실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을 여하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인력거>는 이 지점에서는 솔직하다. 설령 그것조차 자신들의 윤리적 곤란을 드러냄으로써 정당화하려는 방편으로 삼는다고 비난한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기로 선택한 관객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는 우리는 도덕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소비하지만 그것에 대해 별다른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정면으로 그 불편함을 드러낸다.

<오래된 인력거>에서 샬림의 삶을 보여주는 시각은 그의 가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을 상술하려는 쪽에 있다. 그는 인력거를 끄는 노동을 하는데 이 일은 가장 저임금을 받는 일에 속하고 그 때문에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발을 신고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샬림은 늘 맨발로 인력거를 끈다. 다른 인력거꾼들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기교적으로 보일 만큼 다양한 앵글로 인력거를 끄는 샬림을 화면에 담는다. 이것이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동시에 노동하는 인간의 당당함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샬림은 말로 자신의 곤궁을 카메라에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가 일을 할 때 그의 당당한 자존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는 가난한 마초 가장이지만 자신이 건사하는 가족을 위해 초인적인 노동을 감내하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당당함이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화하는 대다수 인습적인 텔레비전 카메라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관객의 시선에 대해 수평적으로 맞서면서 샬림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개별화하고 있다. 카메라로 그의 삶은 보편적 휴머니즘이라는 틀 안에, 공감과 연민과 위로의 틀로 가장한 수직적인 시선의 압제에 굴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란 미학적 테제를 벗어난 형식

이런 장점이 일관되게 이 영화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성규 감독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오래 작업한 장인이고 그의 작업 관행은 어쩔 수 없이 능숙한 테크니션의 손길로 드러난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찍은 화면을 그는 자유자재로 섞고 시공간을 하나의 연대기로 편집하며 화면과 반응화면의 틀로 편집된 것들은 뚜렷한 극적 흐름을 띤다. 미로 스페이스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서 만난 그는 이 영화에 쓰인 숱한 편집효과의 실례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를테면 우기에 물에 잠긴 콜카타 시내에서 인력거를 몰며 일하는 샬림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반의 한 시퀀스는 하룻동안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찍은 숏들을 편집한 것이다. 샬림의 젊은 동료인 마노즈가 과거의 충격적인 상처를 털어놓는, 논란이 될 만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트릭이 쓰였다고 한다. 마노즈가 맨 정신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고 주점에서 술에 취해야만 과거를 주절주절 얘기하는 걸 취재해놓은 상태에서 마노즈를 따로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한 화면을 샬림과 대화하는 장면에 끼워넣었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장치들이 덜커덕 걸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뭔가 연출된 느낌, 혹시 이것이 현장에서 자연스레 포착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것의 시연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논란이 될 뿐만 아니라 비판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거론한 장면이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에 관해 그 경계를 묻게 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마노즈가 상처를 갖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카메라 앞에서는 꺼내놓지 않는다. 샬림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촬영 스탭은 그를 따로 설득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찍었다. 그러고는 샬림과 얘기하는 대목에 붙였다. 나는 이 장면에서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장치와 비슷한 형식적 고려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일관된 극적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이런 트릭이 덜커덕거리는 이물감을 준다면 그것은 카메라 바깥에서 벌어지는 진실 유무의 판단 이전에 감성적으로도 걸리는 부분이다. 진실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 어쩌면 그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고유의 가치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현실은 편집되는 것이다, 라는 명제는 맞다. 편집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왜곡이나 창작자의 주관적 수용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주관적 수용을 관객에게 밝히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예의다. 이것이 현대 영화의 기본적인 미학적 테제였다면 <오래된 인력거>는 그것조차도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상정하고 창작자의 주관적 편집이 용인될 수 있다는 믿음 끝에 나온 형식적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인력거>는 완성도가 뛰어난 다큐멘터리이며 그 뛰어난 완성도를 위해 희생한 것이 적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감독 이성규의 진심을 믿는 쪽이지만 다음에는 그가 더 뻔뻔스럽게 극적 완결성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현실 앞에 순응하며 카메라의 부분적인 무능을 드러내는 쪽으로 가는 것 중에 택일했으면 한다. 이런저런 미덕과 이물감이 공존하는데도 감독이 그가 찍는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느끼는 애증과 신뢰가 적실하게 드러나고 그게 관객의 마음에 흔적을 낸다는 것이 <오래된 인력거>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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