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그림으로 유명한 파리의 ‘생라자르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여를 가면 프랑스의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 도착할 수 있다. 모네는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훗날 파리에서 화가로 생활하면서도 자주 그곳에 들러 그림을 그렸다. 이 위대한 화가가 남긴 바닷가 풍경의 대부분은 그래서, 영화 <르 아브르>의 배경과 같은 곳이다. 다양한 그림 속에서 그 거대한 항구는 파도에 반사된 공기가 내뿜는 황혼의 빛(Lights in the Dusk)을 담은 곳으로 간직돼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최신작 <르 아브르>에서 기존의 연출방식인 ‘최소한의 동선과 미니멀한 몽타주, 간소화된 대사와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최대한의 스토리텔링’을 그대로 고수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마르셀’이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꽤 명성있는 보헤미안이었는데, 지금은 르 아브르에 정착해서 기차역이나 성당 등지에서 구두를 닦으며 지낸다. 딱히 수지가 맞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을 도우며 지낼 수 있는 이 직업을 그는 명예롭다고 여긴다. 영화에서 마르셀이 그려내는 행동반경은 ‘일터와 집, 그리고 동네 어귀의 비스트로’를 꼭짓점으로 하는 트라이앵글 안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이 동선에서 그를 벗어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가봉 출신의 난민 ‘이드리사’의 등장 때문인데, 마르셀은 소년이 엄마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우려고 노르망디를 벗어나 ‘칼레’까지 여행한다. 이와 동시에 마르셀에겐 또 다른 시련이 닥친다. 헌신적인 그의 부인 ‘아를레티’가 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무기는 천성적인 낙천적 성품과 주변인들과의 연대뿐이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무기가 꽤 쓸 만하다는 사실을 마르셀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깨닫게 된다.
프랑스같지 않은, 어김없이 핀란드같은
르 아브르는 원래 17세기 프랑스의 전통적 방어형 항구도시였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상당 부분 훼손되었고, 1945년부터 약 20년 동안 건축가인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축한다. 덕분에 시가지는 지금처럼 페레식 건축물의 특징인 ‘철근 콘크리트’와 ‘옛것과 현대식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져 하나의 커다란 예술품으로 완성되었다. 오늘날 시가지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특징적인 도시의 외경이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가 보이는 장면은 딱 한숏, 이드리사가 마침내 탈출한 배 위에서 르 아브르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다. 이때 ‘성요셉 교회’를 필두로 한 현대적이고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스크린에 비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에서 이곳은 <과거가 없는 남자>나 <황혼의 빛> 등 기존의 카우리스마키가 그린 영화 속의 장소와 별반 차이가 없다. 대체 왜 핀란드가 아니라 외국까지 로케이션 왔는지가 궁금할 정도다. 영화 속 대사처럼, 핀란드에서나 일어나던 일이 벌어졌는데 이곳은 다름 아닌 프랑스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시작부터 이곳이 노르망디임을 홍보하듯 강조한다. ‘모던’(La Modern)이란 이름의 바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지방색을 언급한다. ‘몽생미셸’을 사이에 둔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완력 다툼에 대한 이야기와 북동부 알자스 지방의 특색 등 조연들은 차례로 자기가 맡은 지역을 한마디씩 내뱉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미니멀리즘의 궤도에 오른다. 카페의 주인이 아를레티를 평해 ‘그렇게 로맨틱한 여자는 없다’고 하자마자 아를레티는 자신의 로맨틱한 점을 차례대로 드러낸다. 지금까지 화면에 비친 인물들이 무표정했기 때문에, 이 대사는 인물의 속내를 알리는 유일한 단서가 된다. 항상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서사의 전개를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한다. 전개에서의 ‘경제성’을 발견하고 나면 이제 영화는 온전한 코미디물이 된다. 이후의 스토리는 컨벤션을 따라 관객이 짐작하는 것이 다 맞다. 마르셀이 이드리사에게 빵을 건네자마자 소년은 앞으로 마르셀을 따를 것을, 마찬가지로 ‘리틀 밥’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부인 ‘미미’를 찾아간 장면에서도 무표정한 그녀를 보면서 관객은 그녀가 긍정할 것을 눈치챈다. 플롯뿐 아니라 몽타주도 미니멀하다. 예컨대 ‘고발하는 옆집 남자’는 영화 전체에서 세숏만 등장하는데, 첫 번째 숏에선 얼굴을 가린 채 ‘불법이민자’가 적힌 신문 위로 보이스 오프된 음성으로 나타난다. 다음번이 역 앞에서인데, 아까의 특이한 목소리 때문에 관객은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예전의 고발자와 동일한 인물임을 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얼굴은 ‘모네’ 경감이 이르는 ‘고발하는 옆집 사람들’이란 부류의 대표 격으로 포장된다. 카우리스마키는 무표정하기 때문에 백지처럼 느껴지는 인물들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상황을 던져준다. 그런데 이 상황은 명백하게 어떤 지표를 가리키고 있고, 이제 관객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짐작하기만 하면 된다.
일단 법칙이 정해지면 카우리스마키는 절대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연출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에서 ‘오버 더 숄더’는 금지되어 있고, 인물의 모습은 ‘정면 혹은 프로필’에서만 찍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진행이 이루어질수록 점점 더 납작해진다. 공간을 이동할 때도 이렇듯 입체감은 배제된다. 마르셀이 당도한 도시의 이름은 ‘르 아브르역’ 혹은 ‘칼레역’ 같은 표지판을 통해 장소를 알린다. 이는 영화의 해석을 점점 더 메마르게, 그래서 결국 최소한의 상징적 의미만 남긴 채 희화화된다. 예컨대 마르셀이 꾸벅꾸벅 졸던 칼레의 조그마한 광장은 그 유명한 <칼레의 시민>을 연상시킨다. 자신들을 희생해 도시를 구한 여섯명의 시민대표들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기적처럼 살아났다는 14세기의 신화는 이제 영화를 통해 변모한다. 만일 누군가 칼레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시라 부른다면 영화 <르 아브르>를 거쳐 르 아브르는 ‘피플 오블리주’의 도시로 변모한다. 그러니 이 우화는 가난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노블레스를 전제한, 모든 사람을 향한 메시지를 담는다.
색채의 순환과 이야기의 시간과 끝
영화가 끝이 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느끼는 감동의 실체, 이를 옹호하기 위해 클로드 모네를 논한 어느 평론가의 비판을 빌리고자 한다. 프랑스의 예술비평가 샤를 비고는 생라자르역을 그린 모네의 그림에 대해 “예술가의 내면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인생의 굴곡도 표현되지 않았고, 개인적 특징 역시 부족하다. 즉, 혼이 없는 작품이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모네의 그림을 떠올릴 때 이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것 같다. 같은 전시회에 초대된 세잔의 초상화 역시 혹독한 평을 듣는다. “임신부를 동행한 이들은 이 작품을 되도록 빨리 지나치도록 할 것. 머리와 구두의 색이 괴이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문장들은 지금의 카우리스마키에게도 꼭 맞는 것처럼도 들린다. 공교롭게도 그의 영화에는 ‘모네’ 경감이 등장하고,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구도, 비슷한 색감을 지닌 인물들이 나온다. 게다가 카우리스마키의 클로즈업은 ‘세잔의 <사과>’와 꽤 비슷한 심상을 주지 않는가.
세잔의 정물 속에 담긴 사과는 대개 ‘시간의 흐름, 공간의 의미’를 포함하는 하나의 표상으로 통한다. <르 아브르>에도 이에 해당하는 숏이 몇번 등장한다. 그중 마지막 장면에서의 만개한 체리나무가 가장 인상적이다. 사실 이 영화에는 꽃이 빈번하게 나온다. 메마른 공간에 생기를 주는 유일한 소품인 꽃은 매번 색깔을 달리해서 등장하는데, 나름의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마르셀이 아를레티를 병문안 가며 든 것은 ‘붉은’ 꽃다발인데, 이후에 이드리사가 르 아브르를 탈출하며 입고 사라지는 점퍼의 색이 붉다. 텅 빈 병원의 침상에 마르셀은 ‘노란’ 꽃을 던지는데, 잠시 뒤 아를레티는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색채의 순환의 마지막을 ‘흰’ 체리나무가 차지한다. 정지한 채 나무를 비추는 카메라,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회상하게 된다. 검은 바닷물 속에서 상체를 드러내던 이드리사의 모습은 이제, 낙천적 성격과 주변과의 연대를 거쳐 하얀빛이 되어 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르 아브르의 서민 모두를 구해낸다. 이 얼마나 멋진 우화, 아니 영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