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했던 2011년 한국영화계. 기대했던 스타들의 영화가 조용히 사라진 자리에서 의외의 영화들이 힘자랑을 했고, 3D영화의 원년은 되지 못했지만 국산 애니메이션 성공의 원년이라고는 말할 수 있었으며, 기다려왔던 감독들은 해외에서의 작업을 통해 재회의 시간을 유보했다. 실화영화들이 주목받을 때 실패와 소멸의 진짜 ‘실화’의 순간도 많은 영화인과 관객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2011년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침체’와 ‘격동’ 그 두 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는 해였다. <개그콘서트>의 ‘애정남’과 ‘일수꾼’이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여기에 보태고 싶은 당신의 또 다른 사건과 실화는 무엇인가.
Keyword 01. 심형래의 몰락
라스트 오브 용가리
일수꾼 "한국영화로 할리우드 진출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일단 무조건 큰 영화로 만들어야 하니까 투자를 많이 받아서 제작비를 부풀리면 돼요. 그러면 자동차 수출 몇 백대 한 것 같은 돈을 벌어오라며 나라에서도 돈을 줘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어차피 볼거리 위주니까 이야기는 대충 짜면 돼요. 무서운 괴물을 등장시키면 좋고, 영어가 잘 안되니 주로 몸 개그를 하면 돼요. 해외시장 개척으로 힘이 들 땐 카지노에 가요.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직원들 월급을 안 주면 돼요.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화가 좋아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한 3년 동안 안 줘도 돼요. 국내 관객한테는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려야 하니까 미니홈피 일기장에나 쓸 법한 고생담을 자막으로 넣으면 돼요. 그리고 <아리랑> 같은 노래를 슬쩍 깔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일어나 눈물의 기립박수를 칠 거예요.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상 받는 날이 멀지 않았어요."
인간승리의 표본이나 다름없던 신지식인 심형래 감독의 몰락은 한국영화계의 성공지상주의와 배금주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온갖 루머들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그를 순진한 ‘바보’로 여기며 영웅시했던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410억원의 빚 때문에 더이상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며 자신이 설립한 영화제작사 영구아트의 폐업을 통보했고, 직원들이 지난 3년간 받지 못한 임금 총액은 9억원에 이르렀다. <라스트 갓파더>를 위해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30억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11억8천만원을 지원했지만 영구아트 폐업으로 국비 42억원의 회수는 불투명하게 됐다. 국고지원 선정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의 특혜 의혹도 불거졌다. 지난 12월19일 서울중앙지법은 한국무역보험공사와 기술신용보증기금이 낸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영구아트와 심형래는 47억여원을 지급하라”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99년 <용가리>로 시작된 영구의 신화는 이처럼 씁쓸한 ‘라스트’를 고했다.
Keyword 02. 실화영화의 도가니
실제 사건을 재조명하는 힘
일수꾼 "실화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거 어렵지 않아요. 오늘 아침, 조간신문만 들이파도 소재를 찾을 수 있어요. 아니면 <PD수첩> 다시보기에서 가장 열받는 걸 골라요. 피해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게시판에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에피소드를 골라도 돼요. 만들었다가 쇠고랑차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건 애정남에게 물어보면 돼요. 전 일수꾼입니다잉."
<도가니>의 도가니를 만든 건 공지영의 원작 이전에 끔찍한 실화가 있었다. 280억원 대작 <마이웨이>가 탄생한 배경에는 기록과 증언, 집요한 추적으로 추정된 한 남자의 드라마틱한 여정이 있었으며, <퍼펙트 게임> 속 최동원과 선동열의 호투는 사실 이미 온 국민이 지켜본 경기였다. 이 밖에도 실화에서 길어올린 영화적 매력은 2011년 한국영화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초에는 청주성심학교 야구부의 감동실화가 <글러브>로 제작됐고,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속내를 드러낸 <아이들…>이 개봉했다. <모비딕>도 1990년에 있었던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 고백을 소재로 하고 있다. 법정드라마, 스포츠영화, 정치스릴러, 미스터리, 시대극 등 장르도 다양하니, 가히 실화영화의 풍년이라 할 만하다. 영화와 만난 실화는 그 속내가 분노든 감동이든 ‘실화’라는 타이틀로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관객은 다시 실화의 실체를 궁금해한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난 사례는 역시 <도가니>일 것이다. 실제 한 장애인학교에서 자행된 성폭행 사건의 실체를 그린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이 변했다. 기존의 언론보도로 해내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 사례일 것이다. 과연 2012년에는 어떤 실화들이 영화로 탄생할까? 한국의 영화인들이 죄다 실화에 목을 맨다고 해도 소재 고갈의 우려는 없다. 1년에 나오는 뉴스들로 한해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채울 수 있는 게, 바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위력이다.
Keyword 03. 3D영화의 명과 암
기술이 다는 아니다
애정남 "돈 주고 볼 만한 3D영화와 그냥 2D로 볼 만한 영화의 차이는 도대체 뭔가요? 이것도 상당히 애매합니다잉. 자, 이제 여기서 우리끼리 정해보는 거예요잉. 3D영화를 보고 있는데, 3D안경을 한번도 안 벗고 봤다. 이거는 볼 만한 3D예요잉. 그런데 영화 보다가 지루해 안경을 벗었더니, 화면이 똑같아! 이러면 1만4천원 날린 거예요잉."
2011년 꼭 봐야 했던 단 한편의 3D영화가 있었다면, 그건 <트랜스포머3> 혹은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바타>가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올해도 <아바타>의 후광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3D영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의 3D영화는 ‘만약 3D가 아니었다면’이란 가정에 시달려야 했다. <걸리버 여행기> <그린 호넷 3D>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그리고 <옥보단 3D> 등. 유머나 액션이나 여신의 몸매나 만약 3D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국 최초의 3D 블록버스터인 <7광구>는 이 맥락과 다르다. 3D를 거론하기 이전에 3D와 CG에 목매느라 등한시한 시나리오를 먼저 탓해야 하니 말이다. <트랜스포머3>는 반대로 역시 별 이야기는 없었으나, 3D인 덕분에 자체 기록을 경신한 경우였다. 그처럼 올해는 3D의 명암이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3D는 3D만으로는 관객의 사랑을 받는 3D영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관객을 빨아들일 이야기가 있든지 아니면 관객의 눈을 혹사시키더라도 눈길을 돌리지 않을 만큼의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D에 대한 열광은 현재 전 지구적으로 멈칫한 상황이다. 여러 가지 분석이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것은 이제 관객도 볼 만한 3D와 2D로 보는 게 나은 3D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미흡한 게 많지만, 그래도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전이니 아껴달라는 식의 징징거림은 이제 그만두자.
Keyword 04. 김기덕, 홍상수, 임권택의 신작
감독님 반갑습니다
애정남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 어떤 걸 보는 게 저와 맞을까요? 이것도 애매합니다잉. 그런데 이것도 빨리 정해버리겠습니다잉. 소주 좋아하면 홍상수 영화 보고, 에스프레소 좋아하면 김기덕 영화 보는 거예요잉."
거인이 잠에서 깼다. 지난 2008년, <비몽> 이후 모습을 감추었던 김기덕 감독이 신작 <아리랑>을 들고 2011년 칸영화제에 섰다. <아리랑>은 김기덕 감독이 직접 제작, 시나리오, 연출, 편집, 촬영, 사운드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 작품은 영화는 무엇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해보는 것”이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고, 칸영화제는 그에게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안겨주었다. 당시 칸영화제 참석을 위해 유럽을 찾았던 김기덕 감독은 체류 동안 또 한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한 소녀가 미스터리한 여행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 벌이는 로드무비 <아멘>이다.
그런가 하면 홍상수 감독은 올해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열두 번째 영화인 <북촌방향>은 한 영화감독의 북촌 여행기다.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또다시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는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는 반복되는 동시에 미로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관객에게 경험시킨다. 뿐만 아니라 배우 유준상과 서울의 북촌이 지닌 불가해한 매력 또한 <북촌방향>이 관객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다. 김기덕이 잠에서 깨어나고 홍상수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면, 임권택 감독은 영원히 잠들지 않을 그의 영화적 생명력을 <달빛 길어올리기>로 다시 드러냈다. 김기덕, 홍상수, 임권택의 영화를 모두 한해에 볼 수 있었던 2011년은 관객에게도 흔치 않았던 라인업의 해였을 것이다.
Keyword 05. 한국 감독들의 해외 진출
박찬욱과 김지운은 미국으로, 봉준호는 체코로
애정남 "한국 감독의 해외 진출, 기준이 뭔가요? 이것도 애매합니다잉. 자 이건 빨리 갑니다잉. 영화 시작할 때 삼색 폭죽이 하늘에서 터지거나 노란색 상자가 펑 터지는 리더필름이 나오면 해외 진출 아니에요. 초승달에 걸터앉은 소년이 낚시질을 하거나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하거나 거대한 서치라이트가 하늘을 좍 비춰줘야 해외 진출입니다잉."
한국의 대표 감독들이 바다를 건넜다. 박찬욱과 김지운은 미국으로, 허진호는 중국으로,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의 자본으로 체코에서 영화를 찍는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폭스 서치라이트와 리들리 스콧의 스콧프리가 제작을 맡은 작품으로 아버지를 잃고 엄마와 살고 있는 소녀의 집에 정체가 의심스러운 삼촌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아 와시코스카가 소녀 인디아를, 니콜 키드먼이 그녀의 엄마인 이블린을 연기한다. 지난 10월17일, 크랭크인한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는 그가 서부극의 본 고장에서 만드는 웨스턴영화다. 에두아르노 노리에가가 재판 도중 탈출한 멕시코 마약왕을 맡았으며, 그를 추적하는 보안관 역에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캐스팅됐다.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1782년작 동명 소설을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리메이크하는 영화다. 장동건과 장쯔이, 장백지가 출연해 신해혁명의 혼돈 속에서 위험한 거래를 나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2012년 3월,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 미래의 지구, 노아의 방주처럼 달리고 있는 기차가 배경이다. 약 400억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며 80% 이상 영어권 배우가 출연할 예정이다. 현재 알려진 캐스팅은 송강호뿐이다.
이들의 해외 프로젝트는 단지 해외의 배우를 불러다 해외 로케이션을 하는 영화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해외의 자본이 직접적으로 투입되는 동시에 해외의 프로덕션이 개입되고, 아예 처음부터 해외 개봉을 못박은 프로젝트들이니 진정한 의미의 해외 진출이다. 이들의 성과에 의해 이후 한국 감독들의 해외 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란 전망은 당연하다. 영화감독들끼리 모여 ‘영화연출에 자주 쓰이는 영어회화 무작정 따라하기’ 같은 스터디 그룹이라도 조직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