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는 고민이 많았다. <천일의 약속>의 향기와 <원더풀 라디오>의 라디오 작가 난솔을 떠나보낸 지금 그녀는 어느덧 데뷔 8년차 배우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야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천일의 약속>에서 향기라는 좋은 캐릭터를 만나 사랑도 받았고 이름도 널리 알렸지만 감사한 마음만큼 부담감도 상당하다. 정유미에겐 지금의 주목이 지난날의 시간을 보상받는 것 그 이상의 차원으로 보였다. 그녀의 숱한 고민은 지난 7년간 배우 정유미를 꼼꼼히 다져온 시간을 이제야 펼쳐 보일 때가 됐다는 것에서 비롯된 행복과 닮아 보였다.
2012년을 <원더풀 라디오>로 활짝 연 정유미는 지난해 누구보다 바쁜 한해를 보냈다. <너는 펫>, 드라마 <천일의 약속>, 그리고 <원더풀 라디오>까지 그녀는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쉼없이 달렸다.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정유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친다”며 보조개가 팰 정도로 씽긋 웃었다. 폐지 직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를 담은 <원더풀 라디오>에서 정유미는 욱한 성격을 가졌지만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라디오 작가 난솔을 맡았다. 배우들이 모여 직접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처럼 찍었다는 이번 영화는 대본보다 애드리브 위주로 촬영을 이어나갔다. 배우들은 ‘우리가 작가도 아닌데’를 외치면서도 서로 쓴 대사를 보여주며 회의까지 할 정도였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의 상당 부분은 DJ 신진아의 매니저 대근 역을 맡은 이광수와 정유미의 공이 컸다. 특히 가장 웃긴 부분으로 꼽히는 회식 다음날 난솔과 대근이 모텔에서 눈을 뜨는 장면은 대본에 조차 없다. 정유미는 “100% 배우의 역량과 현장에 맡겨진 상황이니 촬영 내내 부담은 상당했지만 대본대로 하지 않아서 의외의 웃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녀에겐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감정을 쌓아 캐릭터를 단단하게 만든 첫 번째 경험이었다.
터닝 포인트 <천일의 약속>
정유미는 2011년 천차만별 성격의 세 여자를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이뤘다. 그녀를 먼저 찾은 것은 <너는 펫>의 영은. 영은은 주인공 지은을 질투해 그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얄미운 여우다. 설렁설렁 일하지 못하는 꼼꼼한 성격 때문에 촬영 전부터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영은은 정유미에게 아쉬움이 더 컸던 캐릭터다. “지은이를 동경하는 데서 비롯된 질투심 그리고 그 동경처럼 자신도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데 잘 안되는 데서 오는 공허함이 영은이가 지은이를 괴롭히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잡았어요. 그런데 영은이가 지은이를 그냥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져서 너무 단면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녀 스스로도 터닝 포인트로 꼽는 <천일의 약속>은 시작부터 부담이 컸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정유미는 향기에 빠져들기 쉽지 않았던 점이 이번 작품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그토록 원했던 사랑은 가질 수 없었던 향기는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순애보를 가진 인물이다. 초반에 향기에 대한 설명을 정을영 감독과 김수현 작가한테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어, 이 정도는 세상에 있을 법도 한데”라고 느꼈다는 정유미는 다른 여자에게 가겠다며 자신을 버리는 남자를 감싸는 향기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정말 사랑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향기만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약혼자 지형(김래원)에 대한 감정은 정유미의 마음에서 쉽게 끓어오르지 못했다. “향기는 지형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런 반응이 가능한 건 향기가 오랫동안 지형을 좋아했기 때문인데 바로 감정이 안 나오니까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초조하고.” 가장 부담을 느낀 장면은 6회의 이별통보 신이다. 유독 대사도 길고 감정 변화도 많은 순간을 앞두고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며 향기의 애틋한 마음을 차곡히 쌓아나갔다. 나중엔 김래원의 얼굴만 봐도 감정이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저런 애가 어딨어”라고 말하지 않고 향기를 응원해줬을 때, 정유미는 뿌듯했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향기의 순수한 마음을 현실감있게 잘 그려냈다는 반응일 테니까.
그녀는 2004년 드라마 <애정의 조건>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시작부터 좋은 작품을 만났지만 지난 7년간 단역과 조연 사이를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1초 정도 얼굴을 비쳤다는 <실미도>는 물론이고, 드라마 <동이>를 찍었을 때도 배우 정유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디션에서 숱하게 떨어져본 터라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단다. <천일의 약속>의 정을영 감독에게 미팅 한번 해보자는 연락이 왔을 때도 “감히 내가 되겠어”란 마음이었다. 건네준 대본을 읽자 정을영 감독은 “넌 향기가 아냐”라고 했고, 정유미는 기죽지 않고 “네, 아닌 것 같아요”라고 농담까지 건넸다.
좀더 대범하게 좀더 다양하게
물론 마음 한구석은 늘 편치 못했다. “솔직히 창피한 적도 많았어요. 사람들이 몰라봐준다는 건 내가 그만큼 자질이 없다거나 내가 다 못 보여준 거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지금 그녀는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온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때마다 ‘어, 내 역할이 이만큼 커졌네, 그럼 분량도 늘어나겠구나’ 했었는데 이제는 ‘두 번째로 칠 수 있는 역할까지 왔네’ 하면서 지금 이만큼 왔어요. 한편으론 걱정도 커요.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까 하는. 그러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죠. (웃음)”
정유미는 엄마의 등쌀에 밀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향기의 모습과 대범하고 싶지만 표현을 잘 못하는 난솔의 모습이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인간 정유미도 배우 정유미도 아직 갇혀 있는 부분이 많고 사실 겁도 많았어요. 고민도 많았고요. 2012년엔 조금 더 대범해져야겠어요. 제 안에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잘해왔지만 늘 걱정이 앞선다는 그녀가 갑자기 너스레를 떤다. “세상에 얼마나 긴장을 하고 사는지 이것 보세요. 저 어깨 근육이 매일 뭉친다니까요.” 그녀의 매력은 향기와 난솔이 가진 사랑스러움, 그리고 때묻지 않은 긍정에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