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탁월한 연기와 좋은 재료 <세번째 사랑>
2012-01-11
글 : 김효선 (영화평론가)

사람들은 삶이라는 조건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름의 선택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수십억개의 삶의 버전들이 동시에 명멸하고 있다. <세번째 사랑>의 주인공 바니 파놉스키(폴 지아매티)가 겪은 삶의 버전은, 특히 애정문제에서 부침의 연속이다. 첫 번째 아내는 친구의 아이를 사산하고는 자살을 했고, 명문가의 딸과 두 번째 결혼을 하려는 순간 그는 운명적인 상대 미리엄(로자문드 파이크)을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미리엄과 세 번째 결혼을 하고 행복한 시절이 이어지지만, 결국 이들의 관계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영화는 중년의 프로듀서 바니의 회상을 따라, 그가 보헤미안 친구들과 어울리던 청년기부터 알츠하이머 증세를 자각하고 죽음을 예비하기까지 약 40년간의 세월을 화면에 담아낸다. 바니는 뚱뚱한 몸에 덥수룩한 수염, 괴팍한 성격을 가진 비호감형 캐릭터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의를 다하고 의외의 배려를 보이는 인물이다. 폴 지아매티는 바니가 가진 무모한 열정과 야심, 아내에 대한 무력감 등 복잡한 심리와 그만의 매력을 깊이있게 표현해낸다. 그의 탁월한 연기 덕에 바니가 치졸함을 보이는 장면들, 예컨대 미리엄의 재혼남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누드 사진 얘기를 꺼내는 첫신이나 자신이 베푼 호의를 들먹이며 친구를 협박하는 장면도 심정적인 설득력을 갖게 된다. 조역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특히, 더스틴 호프먼은 다정다감한 바니의 아버지로 분해, 활기와 고독이 공존하는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낸다. 그가 삶의 지혜를 버무려 능청스레 늘어놓는 위트 넘치는 대사들은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세번째 사랑>의 원작은 캐나다 작가 모데카이 리클러의 소설 <바니의 버전>이다.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일인칭 화자가 갖는 기억의 혼선을 통해 내러티브에 대한 해석을 열어둔 작품이다. 원작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세번째 사랑>이 소설의 형식이 제공하는 재기와 여담을 활용하지 못한 평면적인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리처드 루이스 감독 역시 내레이션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로 보이지는 않는다. ‘바니의 버전’이 불완전한 기억의 버전이든 한 인간이 살아온 인생의 버전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바니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을 끌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바니의 사연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뜻밖의 운을 만나고,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돌연 세월의 흐름에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공통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니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도드라지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그의 삶이 주는 페이소스를 연민의 틀에 가두어버린다. 그리하여 생의 쓸쓸함이 깊이를 놓친 채, 묘사의 차원에서 정의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좋은 재료에 그친, 다소 단조로운 영화가 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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