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안성기] '국민배우'를 넘어서다
2012-01-12
글 : 주성철
사진 : 오계옥
<부러진 화살> <페이스 메이커> 안성기

박중훈은 트위터에 <부러진 화살>에 관해 안성기와 나눈 대화를 올렸다. “형님! <부러진 화살> 죽인다면서요?”라고 묻자 안성기는 “응, 본 사람들이 좋아해. 극장·배급 관계자들도 호감을 가져서 괜찮을 것 같아”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박중훈의 인사는 “야아~ 잘됐네요. 개봉하면 볼게요”. 그러자 안성기의 대답. “<라디오 스타> 이후로 내 연기 평가가 제일 좋네….”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평가가 좋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지만 안성기처럼 좀체 세월의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바꿔 말하자면 연기에 대한 평가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관록의 배우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이 워낙 좋아하니까 또 극장을 찾고 싶다”고 아이처럼 말하는 그를 보면서 묘한 신선함이 든다. 그렇게 안성기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게 여전히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고 싶은 배우다.

안성기를 만난 곳은 공교롭게도 헌법재판소 근처 카페였다. <부러진 화살>은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석궁 테러 사건’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법정에서 결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관련 법규를 공부하는 영화 속 김경호 교수와 배우 안성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의 공간이다. 사건의 진실은 가려진 채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 알지, 그 사람, 약간 사이코 같은 사람?”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일 그를 동시대의 생생한 인물로 되살려낸 데는 안성기의 존재감이 가장 큰 역할을 하기 때문. 무엇보다 쉽지 않은 역할이고 논란은 불을 보듯 뻔하며 준비 또한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정지영 감독에 대한 신뢰였다. “시나리오를 보내준다고 하기에 ‘네, 좋죠’ 하고 짧게 대답했다. 다들 정지영 감독이 쉬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내내 영화 준비를 했고 영화계에 관련한 일들에 앞장서서 참여했다. 어디 틀어박혀 있던 게 아니라 결코 감각이 무뎌질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피상적으로만 알던 사건이었는데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정말? 진짜! 그러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오로지 대사로 승부해야 하는 역할

<부러진 화살>이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된 데는 안성기가 캐스팅되면서부터다. 정지영 감독은 안성기가 아니면 다른 배우를 써서 저예산 독립영화로도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좀더 다큐적인 느낌이 강했을 터. 하지만 안성기가 출연을 결정하면서 잘라내고 조정했을 법한 여타의 인물들이나 상황들이 온전하게 살아났다. 영화에서 내내 수의를 입어야 하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뭘까. “실제의 김 교수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하나의 캐릭터로서 이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지난 몇년간 만나본 적이 없다. 변호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공부해서 판사와 싸우지 않나. 게다가 그게 또 완벽에 가깝고. 여러모로 희화화할 수 있는 측면도 많은 사람인데 그도 아닌 참 묘한 매력이 있다. 연기자라면 누구나 달려들어 해볼 만한 캐릭터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하겠다고 하니까 정 감독도 약간 놀란 눈치더라. (웃음) 그러면서 다른 기성 배우들도 출연하게 됐고 좀더 상업적 재미를 띤 작품이 됐다.”

영화에서 담당판사의 피 묻은 셔츠가 증거로 제출되지만 피의자 김경호 교수는 실제로 화살을 쏜 일이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당연하게도 이뤄져야 할 혈액 검사는 계속 무시된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이어진다. “시나리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거 너무 말이 안되는구나 싶어서 정 감독에게 물어봤더니 다 사실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해외영화제 같은 데 나가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고 허술한 이야기 구조라고 할 만한 내용인데 다 사실인 거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라는 그는 “그래서 어차피 말도 안되는 상황에 던져진 인물이라면 시나리오에 충실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 박 변호사(박상원)의 모델이 된 분은 만나봤지만 영화 외적인 디테일들이 들어올 것 같아서 실제 김 교수는 만나지 않았다. 그게 맞다고 봤다”고 말한다. 철저히 시나리오 안의 김경호, 법정 안의 김경호에 충실하려고 한 것이 그의 연기의 핵심이었다.

안성기를 법정에서 만나는 건 두 번째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에서 명성기 변호사로 나온 그는 <부러진 화살>과는 반대편에서 피의자를 압박하는 대기업의 고문 변호사였다. 대기업 과장 추형도(문성근)의 아내 이경자(황신혜)는 회사가 남편에게 과도한 노동을 시키는 동안 자신도 생과부로 지내왔다며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을 낸 것. 맨 처음 명성기를 만나러 온 이경자에게 명성기는 “죄송하지만 이건 말이 안되는 소송입니다. 수학에도 공식이 있는 것처럼 재판도 원고와 피고간의 기본적인 인과관계가 있는데 이 사건은 그런 게 없어요. 상식 밖의 소송입니다”라며 포기를 종용했던 변호사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안성기가 바로 그런 판사, 검사와 싸운다. 게다가 <부러진 화살>의 악질 판사가 바로 당시 안성기에게 당했던 문성근이다. 또 앞서 담당 판사였던 이경영은 역시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에서 내내 한기주 병장(안성기)를 쫓아다니던 베트남전 전우 변진수였다. 그런 소소한 재미와 겹쳐 <부러진 화살>을 보면 영화가 담고 있는 실화와는 별개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이경영, 문성근, 두 판사 역은 진짜 빛났다”는 안성기는 “오래도록 함께 지켜보면서 호흡도 잘 맞고 워낙 내공이 있는 배우들이라 생각지도 않았던 에너지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은 <부러진 화살>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워낙 오래전의 워밍업이긴 하지만 법정영화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서도 ‘이거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안성기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하면서 정말 수모를 받았다”고 웃으며 말한다. “법과 관련된 대사들을 익히는 게 장난이 아니더라. 클라이맥스 촬영할 때는 점심시간까지 넘겨가며 한신만 거의 2시간 넘게 촬영했다. 강우석 감독도 ‘이거 더 촬영해봐야 소용없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찜찜하게 오케이를 한 느낌이었다. 오케이하자마자 법정 안의 보조출연자들도 박수치고 난리가 났는데 ‘야, 이제 점심 먹으러가자’ 하는 그런 박수였다. (웃음) 그래서 다시는 ‘사’자 들어가는 역할은 안 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는지, 게다가 거의 원톱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라 밤낮으로 대사를 외고 또 외웠다.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대사 부분만 전부 손으로 직접 써가면서 입에 맞게 바꾸고 차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계속 수의를 입고 나오고, 전체적으로 냉정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 등 별다른 변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대사’에 집중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캐릭터에 다이내믹함을 불어넣어야 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몰입’의 흥분, <페이스 메이커>에서 다시 한번

<부러진 화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스포츠영화 <페이스 메이커>에서 안성기는 색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영화 속 마라토너 주만호(김명민)를 페이스 메이커로 기용하는 냉철한 국가대표팀 마라톤 감독 ‘박성일’이다. 과학적 훈련보다 ‘멘털’을 중시하는 전통적 개념의 코치이고 과거 선수들의 항명 사태로 선수촌을 떠난 경험도 있는 사연 많은 인물이다. 말하자면 ‘국민배우’라는 칭호처럼 여러 작품들에서 ‘리더’를 연기해온 그 이미지의 연장선이다. 얼핏 <실미도>(2003)의 지옥훈련을 이끈 냉혹한 최 준위(안성기)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주만호의 마라톤 완주의 꿈을 은근히 응원하는 속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한 마라토너의 순수한 꿈을 좇아가는 모습이 좋은 영화여서 출연을 결정했다”는 그는 “하지만 정장 입은 감독 역할이라 답답했다”고 말한다. “왜 마라톤 영화 보면 코치가 자전거 타고 선수 뒤를 따르거나 아니면 옆에서 같이 뛰면서 함께 훈련하는 장면이 보기 좋지 않나. 처음에 그런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나도 선수들처럼 트레이닝복 입고 함께 뛰고 싶은데 가만히 서서 스톱워치로 기록만 재고 있으니. 나 운동화 신고 뛰면 잘 뛸 수 있는데. (웃음)”

공교롭게도 <부러진 화살>과 <페이스 메이커>는 같은 날 개봉한다. “많은 영화를 찍던 과거에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묘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어쨌건 두 영화 모두 그에게는 모처럼 ‘몰입’의 흥분을 준 영화들이다. “<부러진 화살>에서 ‘이건 독재입니다’라고 외치며 일어설 때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분노했다. <페이스 메이커>에서도 만호가 끝까지 자기 꿈을 위해서 뛰고 싶다고 할 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필요 이상의 감정까지 느껴버리는 건데, 가끔은 그게 참 짜릿하고 오히려 캐릭터를 더 빛나게 만들어줄 때가 있다.” 그렇게 그는 여전히 시나리오 바깥에서 관객과 함께 울컥하고 박수치고 싶어 하는 배우다. 그런 그를 새해 들어 모처럼 두편의 꽉 찬 영화로 만나게 됐으니 한국영화계로서도 꽤 기분 좋은 출발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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