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은 일종의 도박이다. 관객이 기대했던 감정을 클로즈업 숏이 제대로 터트리지 못하면 리스크는 곱절이 된다. 1월12일 개봉하는 <밍크코트>는 클로즈업의 영화다. 배우에 대한 믿음 없이는 찍을 수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그 결과는? 지난해 말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들은 <밍크코트>에 대상을 안기며 이렇게 덧붙였다. “주연배우 황정민씨가 보여준 현순은 최근 충무로와 독립영화계를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캐릭터였습니다”라고. <밍크코트>의 황정민은 극중 현순에 빙의된 것 같은 광기의 연기를 선보이며, 보는 이를 시종 리드한다. 2년 전 <하녀>에서 은이(전도연)의 친구 역으로 잠깐 얼굴을 비춘 것을 제외하면, <지구를 지켜라!>(2003)의 순이 역을 맡은 뒤 대부분의 시간을 연극 무대에서 보내왔던 황정민. 그녀가 돌아왔다. 제대로 돌아왔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해 죄송해요. 너무 예쁘게 하고 나오셔서.
=제가 맨 얼굴로 (<밍크코트>에서 현순이 입고 다니는) 털 달린 청재킷을 입고 왔어야 하나요? 하하하하. 그 옷이 무겁긴 한데 정말 따뜻해요. 두 감독님이 심혈을 기울여 고르신 옷이거든요.
-그 의상, 혹시 선물로 받으셨나요.
=아니요. 안 주시던데요. 감독님들이 갖고 계세요. (달라고 해서) 입고 다닐까요?
-<지구를 지켜라!> 이후 영화 출연은 뜸했는데요.
=출연작이 <박수칠 때 떠나라> <바람피기 좋은 날> <하녀> 이렇게 세편뿐이잖아요. 일단 제의가 많이 안 들어왔어요. 하하하하. 여자 캐릭터가 많지 않기도 하고. 예쁘고 잘나가는 배우들도 (탐나는 역할이) 모자라다고 할 정도잖아요.
-이상철 감독이 <밍크코트>의 현순 역을 제안했을 때, 약간 주저했다고 들었어요.
=현순의 나이 때문에. 무대에 설 때 나이 든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어릴 때야 멋모르고 흉내냈지만, 연기가 뭔지 알게 되니까 겁이 났어요.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면 자연스럽게 삶의 냄새가 묻어나오잖아요. 미숙한 경험으론 채울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영화 출연할 때도 캐릭터의 나이를 좀 따졌어요. 어차피 나이 좀더 먹으면 아줌마, 할머니 역할 할 텐데 지금 애써서 하진 말자, 그런 마음이었죠.
-현순은 심지어 결혼한 딸을 둔 엄마잖아요.
=그래서 걱정 많이 했다니까요. 게다가 제가 미혼이잖아요. 연극과 달리 영화는 더 리얼하고 실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줘야 하는데. 무대면 분장이라도 하죠. 그런데 (분장으로) 카메라를 속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말하면 욕먹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조금 동안(童顔)이에요. 하하하하. 제 동안이 화면에 보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고. 꾸며야 하면 서로 불편해져요.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 저도 연기하는 게 불편하고. 그래도 하다보니 수진(한송희)이가 정말 제 딸처럼 느껴졌어요. 현순은 가족에게까지 따돌림당하고, 그래서 딸에게 더 집착하는 인물이잖아요.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그런 현순에게 집중하니까 되던데요.
-피붙이는 얼굴이나 기질은 물론이고 말투도 얼마간 닮았잖아요. 수진이 화내는 장면을 보면 현순하고 정말 똑같던데요. 촬영 전에 특별히 약속한 게 있나요.
=그래요? 같이 뭘 짠 건 아닌데. 감독님이 미팅을 할 때도 저랑 송희랑 같이 한 게 아니라 따로 하셔서.
-정동락 감독의 단편 <꽃님이>(2010)를 보고 두 감독이 캐스팅하기로 맘먹었다던데요.
=둘 다 외골수죠. 되는 일 하나 없고 그렇다고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다만 현순이는 종교적으로 무장되어 있죠. 완벽하고 절실한 믿음이 있잖아요. 그에 비해 꽃님이는 그런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헤매게 되고, 더 흔들리는 인물이죠.
-현순은 엄마인 동시에 딸이죠. 유아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송희의 회상장면에서 특히 잘 나오는데. 현순은 딸에게 집착하는 만큼 엄마에게도 매달리죠. 안쓰러운 인물이에요. 만약 제 엄마가 현순 같았으면 저도 정말이지. 하하하하.
-촬영 전에 감독들이 <브레이킹 더 웨이브> <비밀과 거짓말> DVD를 건네줬다면서요.
=감독님들이 이 여자의 이런 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구나, 대략 알 수 있었어요. 근데 두 영화 모두 너무 재밌잖아요. 보고 나서는 겁먹었어요. 이런 연기를 저한테 바라느냐고, 저 못한다고. 그랬더니 감독님들이 자신들도 그만큼 못 찍는다고 하시던데요.
-촬영 초반에 감독들과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디테일한 연기 주문에 대한 거부감도 보였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제가 적응을 잘 못했던 때가 있었어요. 감독님들 말을 못 알아들은 거죠. 스타일이 맞으면 ‘아’ 해도 ‘어’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전도사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을 찍을 때 대사를 치고 나서 환하게 웃었어요. 현순이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말씀을 받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몇 테이크 찍은 뒤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조금 있다가 무겁게 한번 가보자고 했어요. 연기하다 보면 민감하고 예민해질 때가 있는데, 그때가 그랬죠. 제 입장에선 그럼 아까 이야기한 건 뭐지, 싶은 거죠. 감독님들이 원하는 방향이 이거구나 싶어서 했는데 다른 반응이 나오니까 혼선에 빠진 거예요. 결국 그 장면은 다 빠졌어요. 뭘 해도 맘에 안 드셨나봐요. 하하하하. 이런 게 다 배움의 과정인 것 같아요.
-장편영화에서 주역을 맡은 건 처음인데요. 쾌감 같은 건 없었나요.
=연기를 할 땐 그럴 여력이 없어요. 이 장면에서 어떻게 해야지, 뭐 이런 생각뿐이니까. 여전히 카메라가 어렵고 불편해요. 모니터도 잘 못하겠고. 제가 모자란 부분은 제가 더 잘 알잖아요. 연극할 때도 녹화해놓은 영상 보면 소름이 끼쳐요. 그런데 <밍크코트> 하면서 앞으론 열심히 봐야겠구나 싶었어요. 봐야 뭐가 모자라고, 어딜 보충해야 하는지 공부할 수 있잖아요. 타이트한 숏들 볼 때마다 멋쩍고 창피했지만. 두세번 참고 보니까 리액션, 호흡, 집중도를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인터뷰 전에 이상철 감독님과 잠깐 통화를 했어요. 그런데 같이 작업을 했는데도 좀 어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두분 모두 배려가 많아요. 자분자분 돌려서 말하시고. 반면 전 다이렉트한 성격이라서. 술자리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도 있겠지만, 저예산영화다 보니 일정이 빡빡해서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어요. 제 장면 끝나면 감독님들은 쉬지도 못하고 다른 장면 찍어야 했으니까.
-장편 촬영은 단편과 다르잖아요. 몸상태는 어땠나요.
=병원장면 찍을 때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어요. 그래도 막상 닥치면 연기하는 게 배우인 것 같아요. 무대에 설 때도 아무리 힘들어도 막상 런이 돌면 쭉 가거든요. 몸은 지쳐도 엔도르핀이 어디선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끝나면 앓는 것이고.
-현순의 외곬스런 성격은 누굴 상대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미워하는 가족과 애정을 쏟는 딸에게 하는 게 같을 순 없죠. 다만 사회생활 을 할 때 현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선 좀 고민이 있었어요. 현순이 우유배달을 할 때 만나는 아줌마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결국 상처를 숨기고 고분고분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하는 식으로 잡
았죠.
-예전에 오지혜씨가 <한겨레21>에 쓴 인터뷰를 봤어요. 무대에 서는 동안 10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면서요. 남대문 시장에서 ‘어서 옵쇼’도 했고, 은행에서 골프회원권도 받았고, 털실공장에서 시다도 했고, 주방용 칼 판매 영업도 했고. 혹시 현순처럼 우유배달은 안 해봤나요.
=하하하하. 우유배달은 새벽에 해야 하는 거잖아요. 새벽엔 자야죠.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처럼 매일 해야 하는 일은 연극할 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안 했어요.
-촬영 직전에 바로 앞 장면의 대사와 감정들을 직접 실연해보고 연기에 들어갔다면서요.
=영화하시는 분들 보면 대단해요. 순서에 상관없이 찍는데도 계산을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전 그게 잘 안돼요. 직접 해봐야 아는 거죠. 제겐 머릿속 계산보다 몸의 경험이 더 중요해요. 생각한 대로 연기가 나오는 배우는 천재 아닐까요. 저도 무대 서기 전에 오늘 이 대목이 미진했으니 이렇게 해보자고 맘먹지만 그때마다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얻었어요. 연극보다 영화는 즉흥력과 순발력이 더 필요하니까 더 힘들어요.
-극중 현순처럼 무엇에 빠져본 적 있나요. 연극 말고.
=사랑할 때는 누구나 그렇지 않아요?
-언제 그런 사랑을 했는데요.
=글쎄. 그게 미친 듯이 사랑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하하하하하.
-교회에 다닌 적 있나요. 다녔다면 방언을 해본 적도 있을 텐데요.
=어렸을 땐 열심히 다녔는데 연극하면서 술자리 잦아지고 공연하면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멀어지고 교회에 잘 안 갔어요. 저도 방언이 하고 싶을 때가 있었죠. 그게 은혜라고 생각했으니까.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잖아요. 방언 내려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고. 근데 전 안되더라고요. 영화는 가족드라마 안에서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드러나는 식인데, 시나리오 단계에선 종교적인 갈등 부분이 훨씬 강했어요. 그래서 너무 종교영화처럼 받아들여질까 우려도 했고.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현순의 방언은 어떤 간절한 대사처럼 들렸어요.
=운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기도의 내용이 있고, 그걸 가지고서 방언을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보면 정말 민망해요.
-부끄럽다고 했지만, 관객으로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이 있을 텐데요.
=좋다, 나쁘다는 아니고. 마지막 옥상장면을 보면 그날 감정이 떠오르긴 해요. 현순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잖아요.
-실제로 현순과 같은 딜레마에 빠졌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엄마와 자식이 물에 동시에 빠졌을 때 자식부터 구한다고 하잖아요. 엄마한테는 받기만 하고, 커서도 잘 안 돌려주고. 반면 자식은 내가 쏟아야 하니까. 애정은 같아도 표출되는 방식은 그렇게 서로 다르죠. 저도 3년 전부터 엄마랑 같이 살고 있는데, 잘 못해드려요. 외롭지 않게 말동무해드리고, 밥 한번 같이 먹으면 되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했죠.
-어머니가 <밍크코트>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엄마는 제가 나오면 무조건 다 잘했대요. 연극할 때도 작은 역 맡으면 연출가 선생님한테 밉보였냐 하시고. 요즘은 일일드라마 매일 챙겨보시면서 ‘어제 너 뭐 입고 나왔더라’며 좋아하세요. 어르신들한텐 드라마가 최고예요.
-일일드라마에 출연하나요.
=JTBC의 <청담동 살아요>에서 상류층 셰프로 나와요.
-럭셔리 캐릭터는 처음 아닌가요.
=별로 없었죠. 근데 대한민국 1% 부자로 나와요. 가난한 인물은 자신있는데. 하하하하하. 다행히 제가 쿨하고 여유있는 성격인지라, 부자려니 하고 잘난 척하면서 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