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자전거 탄 소년>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음악이 나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주인공 소년이 아동보호소 직원에게 붙잡힐 때, 그래서 그가 낙담하여 걸어갈 때, 우리의 귀에 들린 소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일명 <황제>의 2악장이다. 영화에서 음악이 사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엄격한 리얼리스트인 다르덴의 영화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제>, 다르덴 형제 최초의 영화음악
다르덴의 영화에서 음악이 이렇게 쓰인 적은 없었다. 곧 영화 내에 음원이 있어, 음악이 들리는 경우는 있었지만(디제시스), 일반적인 영화처럼 영화 속 현실을 무시한 채 외부에서 음악을 입힌 경우(非디제시스)는 없었다. 다시 말해 다르덴 형제는 음악을 쓸 때도 그것이 화면 안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경우로 제한했다. 그럴 때도 감상적인 음악은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지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외재적인 음악을 썼다. 우리는 음악이 어디서 나오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베토벤의 피아노곡을 듣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음악의 사용은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에겐 큰 변화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고유한 미학인 리얼리즘을 일부 훼손시켰다. 영화 속 현실에 있지 않은 음악을 끌어 쓴다면 그건 리얼리즘의 공식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겐 바로 그런 변화가 <자전거 탄 소년>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영화음악의 인위성, 또는 신파적 태도를 경멸할 것 같은 다르덴 형제가 절약하듯 조금씩 들려주는 베토벤의 피아노곡은 극적인 긴장과 카타르시스는 물론, 음악의 숭고함까지 아름답게 전달하고 있어서다.
<황제>는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제국의 수도이자 베토벤을 영접한 음악의 수도 빈이 나폴레옹의 공격을 받아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작곡했다. 이미 귀는 들리지 않았고, 공화주의를 배반한 나폴레옹에 대한 원망이 체념에 이를 때였다. 빈 음악계의 ‘황제’였던 베토벤이 전쟁의 잔인함과 인생의 나락에 공포를 느낄 때 만든 곡이다. 현란하고 장쾌한 1악장에서 시작한 이 협주곡은 죽음처럼 고요한 2악장을 거쳐, 다시 1악장의 화려함을 반복하는 구조다. 영화에서 쓰고 있는 부분은 2악장 ‘아다지오 운 포코 모소’(Adagio un poco mosso, 느리지만 약간 활발하게)이다. 1악장이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면, 2악장은 장탄식이 나오는 비가다. 영화는 이 비가를 네번에 걸쳐 나눠 이용하고 있다. 4막 구조의 드라마를 끌고 가는 변곡점마다 베토벤의 아다지오가 들려오는 것이다.
처음 이 음악이 들릴 때는, 마치 소나타의 도입부에서 주제음악이 연주되듯, 짧고 강렬한 현악기의 비통함이 탈출에 실패한 소년의 낙담을 위무할 때다. 영화는 전형적인 다르덴 스타일이다. 우리는 소년이 왜 탈출하려 하며,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이유가 뭔지, 그래서 지금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의 영화가 늘 그렇듯 대략 20여분이 지나야 전체 내러티브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정보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러나 도입부의 가슴을 베는 듯한 짧은 아다지오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태도는 어느 정도 결정짓고 있다. 우리는 아직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몰라도 베토벤의 비통함에 이미 감염돼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사용은 영화의 중반부다. 소년이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차 안에서 자해할 때다. 다르덴 형제 영화의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소년의 아버지는 자본주의의 희생양으로, 조르지오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면 ‘호모 사케르’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어디다 버려도 누구 하나 애도할 것 같지 않은 추방된 인간이다. 그런데 제도에서 밀려나고 버림받은 그는 딱하게도 돈을 벌겠다며, 다시 말해 불가능한 꿈을 이루겠다며, 자기 자식을 버린(버려야 한)다. 소년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번째로 아다지오가 들릴 때는 소년의 세상이 무너진 날, 말하자면 ‘가족 로맨스’가 무참하게 깨진 날이다. 이상적인 아버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첫 번째 아다지오보다 조금 더 길게 음악은 위무하듯 연주되고, 우리는 울고 있는 소년을 본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늘 사회적인 문제에 비판의 날이 서 있다. 잔인한 운명 앞에 눈물짓는 계약직 노동자(<로제타>), 신생아를 팔아서도 하루를 연명하려는 부랑자(<더 차일드>), 사람의 품위를 포기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로나의 침묵>) 등 우리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희생자들이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제도의 모순 때문에 나락으로 내몰린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만든 문명이란 게 따지고 보면 자본가의 음모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렇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사회적 주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멜로드라마 속의 ‘자전거’
그런데 <자전거 탄 소년>은 이런 영화적 태도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내러티브의 구조를 보자면 <자전거 탄 소년>은 멜로드라마다. 아버지-위탁모(유사 어머니)-소년의 삼각관계는 전형적인 가족멜로드라마의 틀이다. 유일한 핏줄인 생부로부터 받고자 하는 ‘당연한 사랑’이 거절되는 데서 멜로의 갈등이 잉태된다. 한 사람은 끈질기게 매달리고, 또 한 사람은 비정하게 돌아서는 이야기는 수많은 멜로드라마가 반복하는 관계다. 소년의 꿈은 거부된 가족관계를 복원하는 데 있고, 생부는 끈질기게 찾아오는 아들을 마치 <변신>의 벌레를 보듯 피한다.
소년이 꿈꾸는 복원된 가족은 자전거로 상징화돼 있다. 말하자면 자전거는 남들처럼 가족이 있던 행복한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소년은 자전거 타기에 매달린다. 자전거를 타는 순간은 가족관계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때다. 두 번째로 베토벤의 아다지오가 연주되는 부분, 곧 자해할 때부터 다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혼자 길을 달리는 모습이 보일 때까지, 이 음악이 비교적 길게 연주되는 것은 말하자면 소년의 가족에 대한 염원이 간절하게 표현된 부분이다.
자전거의 이런 영화적 상징은 물론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서 나왔다. 여기서도 아버지-어머니-아들의 3자로 구성된 가족의 환유가 바로 자전거다. 자전거는 가족의 일부이고, 가족의 끈을 묶는 안전한 장치다. 그 자전거를 도둑맞으며, 가족은 위기를 맞는다. 말하자면 ‘자전거 도둑’이란 말은 ‘가족 도둑’으로 고쳐 쓸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도둑맞은 자전거를 되찾기 위해 하루 종일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추락 위기의 가족을 구하려는 애타는 심정에서다. <자전거 탄 소년>도 자전거가 없어진 데서, 다시 말해 가족이 없어진 데서 시작한다.
버림받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그 상처를 반복하여 확인한다. 이것도 멜로드라마의 오래된 상투성 가운데 하나다. 아다지오의 세 번째 사용은 그럴 때 연주된다. 소년은 버림받은 사실을 알고 자해까지 했지만, 어리석게도 또다시 생부를 찾아간다. 아버지가 돈이 없어 자신을 버렸다고 오인한(오인하고픈) 소년은 범죄를 저질러 생긴 돈을 들고,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매달린다. 소년은 간절한 눈빛으로 손에 지폐를 든 채 아버지를 바라보지만, 매정하게 밤에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또다시 버림받은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위탁모에게 되돌아갈 때, <황제>의 아다지오가 연주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아다지오는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혼자 달리는 모습을 배경으로 연주돼서 그런지, 앞의 경우보다 더욱 감성적으로 느껴진다.
죽음에 도전하는 오르페우스의 음악
“음악은 죽음에 도전한다.” 슬로베니아 학파인 믈라덴 돌라르가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에서 해석한 음악의 본질이다. 그가 대는 근거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를 감동시켜 죽은 자, 곧 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려냈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음악이 갖고 있는 탄원, 혹은 염원의 간절한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감히 죽음에 도전한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아다지오가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이다. 소년은 그날 밤, 곧 돈을 들고 아버지에게 매몰차게 쫓겨난 날, 사실상 어른이 됐다. 그날은, 밤 외출을 막으려는 위탁모의 팔을 가위로 찌르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말하자면 유사(類似) 부친살해를 하고 나왔는데,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매몰찬 거부를 재확인한 날이다. 다시 말해 소년은 그날 밤, 유아기의 문턱에서 떠밀려 어른이 됐다. 이제 그는 더이상 싸울 때면 상대방을 입으로 물어뜯는 구순기의 소년이 아닌 것이다. 그날의 사고를 극복한 뒤, 위탁모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새롭게 시작한 가족관계의 출발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소년이 원래 원했던 가족관계는 따로 있었지만, 세상을 좀 알게 된 지금은 제도로서의 가족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도 좋을 텐데, 영화는 에필로그 같은 여지를 남겼다. 범죄의 피해자 아들이 복수하기 위해 던진 돌에 맞아 소년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시퀀스다.
소년은 죽은 듯 쓰러져 있고, 돌을 던진 소년과 그의 아버지는 사고사로 거짓 신고하기 위해 한창 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이때 사실 소년이 죽었다고 봤다. 그런데 갑자기 소년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간다. 이때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된다. 이번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2악장을 거의 다 들을 수 있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년이 일어나는 행위에는 부활의 느낌이 배여 있다. 그 부활에 쓰인 음악이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처럼 베토벤의 피아노곡이 소년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죽음에 도전하는 음악이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오르페우스의 탄원하는 음악을 우리는 들을 수 없지만, 아마 <황제>의 2악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소년이 가족에의 염원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는 베토벤의 아다지오를 들었다. 말하자면 베토벤의 아다지오는 오르페우스의 탄원의 음악이다. 그 아다지오를 다르덴 형제는 소년의 테마음악으로 이용하고 있다. 곧 오르페우스의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소년의 마음이고, 그 감정은 베토벤의 아다지오로 연주돼 있다. <황제>의 2악장은 죽음을 움직이는 그런 숭고함을 갖고 있다. 유아기와의 이별(죽음)에 방점을 찍고, 이제 어른의 길(부활)로 들어서는 운명의 음악인 셈이다.
다르덴 형제는 <자전거 탄 소년>을 통해 미학적인 전환점을 보여주었다. 엄격한 리얼리즘의 태도를 약간 버렸다. 그러면서 멜로드라마의 장르 공식도 끌어 쓰고 있다. 멜로(melos: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이 자연스럽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관객과의 관계를 더욱 폭넓게 만들 것 같다. 아직까진 다르덴 형제의 명성은 시네필 또는 유럽에 한정된 느낌이 있다. 음악과 장르의 틀을 일부 빌렸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고 있어서, 다음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다르덴 형제의 변화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M. 버터플라이>(1993)를 만들 때의 변화를 떠오르게 한다. 호러와 SF의 혼성 컬트영화 감독이던 ‘괴짜’ 크로넨버그는 처음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일부로부터 상업적인 변절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지금은 어느덧 ‘살아 있는 대가’가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