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앤드루 가필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포스터 속 거미 문양 그림자의 주인 말이다. 스파이더맨 보디 슈트를 입고 기괴한 자세로 벽에 매달려 있는 이는 사실 가필드의 대역을 맡은 최일람이었다. 할리우드에서 한국계 미국인 스턴트 배우로 활약 중인 그는 데뷔 8년 만에 <트랜스포머> <아바타> <토르: 천둥의 신>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 굵직한 영화들에 참여하며 빠르게 성장했고, 아시아계 스턴트 배우로서는 최초로 스파이더맨 대역자리까지 꿰찼다.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보충촬영을 위해 그가 다른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오길 기다렸을 정도로 그의 실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아래는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는 그가 아낌없이 털어놓은 ‘할리우드에서 스턴트 배우로 살아가는 법’이다.
-어떻게 할리우드 스턴트계에 입문했나.
=29살 때 무작정 1만달러를 들고 할리우드로 향했다. 처음 찾아간 곳이 <콜래트럴> 촬영장이었는데 데모 테이프와 이력서를 내밀었더니 SAG(배우조합-편집자)에 가입돼 있냐고 묻더라. 알아보니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엑스트라를 해봤거나 대사가 있는 단역 혹은 광고 출연 경력이 있어야 가입이 가능했다. 열달쯤 지나 돈도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맘먹었을 때쯤 돼서야 겨우 나이키 광고 오디션에 붙었고 SAG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들어온 첫 영화가 테렌스 맬릭의 <뉴 월드>였다.
-테렌스 맬릭의 현장은 고되기로 유명한데, 혹독한 신고식이었겠다.
=최고로 힘들었던 영화 중 하나다. 버지니아 숲속에 들어가 찍었는데 인디언 역이라 옷을 입을 수도, 보호패드를 착용할 수도 없었다. 끝내고 나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거기다 열흘 촬영을 위해 모호크식으로 머리를 밀라는 거 아니겠나. (웃음) 그래도 첫 영화니까 군말없이 했지.
-주로 아시아계 배우의 대역을 많이 했다. <토르: 천둥의 신>에서는 아사노 다다노부의 대역이었고.
=SAG의 규칙상 대역은 같은 성별, 같은 인종이 맡아야 한다. 백인 남성들의 스턴트계 독점을 막기 위해서다. 불가피하게 다른 성별이나 인종의 대역을 쓸 경우에는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 나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찍을 때 사유서를 냈다.
-<아바타>에서는 제임스 카메론이 가장 선호한 스턴트 배우였다고.
=모든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에 높은 점수를 준 것 같다. 가령 익룡을 타는 장면을 찍는다고 치자. 먼저 시각효과감독이 와서 팔에 붙인 점이 보여야 하니까 너무 상체를 낮추지 말라고 한다. 그다음에는 미술감독이 와서 활이 보이게 머리를 낮추라고 하고, 조명감독은 얼굴을 너무 돌리지 말라고 하고, 마지막에 제임스 카메론이 나타나서는 완전히 다른 자세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앞사람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모두를 조금씩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아바타>를 찍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바타>는 할리우드 최고 스탭들이 참여한 모션캡처영화였다. 그들과 4년 동안 일하고 나니 새로운 모션캡처영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내게도 제안이 들어오더라. 이 바닥도 다 인맥이다.
-<지. 아이. 조2>에선 무술 조감독이었다. 이병헌의 대역이었던 정두홍 무술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정두홍 무술감독으로서는 할리우드 경험을 쌓고 싶어 왔을 텐데 돈이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독창성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실망이 컸을 거다. 원래 동작 하나만 바꾸려고 해도 제작자 승인까지 기다리려면 이틀씩 걸리는 게 할리우드이기도 하고.
-스턴트 배우로서 체감하기에 홍콩 무협영화나 아시아의 액션영화가 할리우드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돈가.
=없진 않겠지만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 할리우드는 뭐든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성룡의 액션도 제대로 보여주려면 롱테이크를 살려야 하는데 할리우드식으로 편집해버리니까 시시해 보일 수밖에 없다. 또 할리우드에선 리얼리티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소송에 걸릴까봐서다. 안전을 보장받는 이점도 있지만 그만큼 실감나는 액션을 보여주기 어렵다. 스턴트란 본래 위험한 일이고, 위험을 감수할수록 좋은 액션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아시아계 스턴트 배우들의 재능이 훨씬 뛰어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