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디 아더스> 들고 내한한 아메나바르 인터뷰 (1)
2002-01-18
글 : 김혜리
“지루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올라”(Hola)! 지난 1월8일 내한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첫인사는 상냥했지만, 한눈에도 그는 이렇게 터무니없이 거창한 여행보다 마드리드의 아파트에서 직소퍼즐을 맞추고 키보드를 뚱땅거리는 일을 스무배쯤 좋아할 청년으로 보였다. 깁스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발목을 끌고 열여섯 시간을 여행해온 아메나바르 감독과 마주 앉은 곳은, 밤 9시의 검게 얼어붙은 충무로가 내려다보이는 극장 꼭대기의 카페. 마치 두개의 세계를 동시에 보고 있는 듯 오묘한 비대칭을 이룬 그의 눈을 보며 귀를 기울이는 동안, 바로 옆 상영관에서는 400여명의 관객이 그의 영화 <디 아더스>에 즐겁게 희롱당하며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 자, 편안히 앉으셨나요? 아무래도 이것부터 물어야겠습니다. 당신은 세편의 장편을 통해 매번 관객의 기대를 한쪽으로 몰고가다 뒤집어엎었습니다. 당신에겐 분명 플롯으로 그물을 치는 취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선적인 서사는 도무지 성에 안 차는 건가요.

이번 영화 <디 아더스>에서 내레이션은 비교적 단선적으로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관객을 일부러 ‘오도’(誤導)하는 트릭을 즐기는 건 사실입니다. 짐짓 딴 데를 쳐다보게 하는 기교는 미스터리, 무지의 상태를 표현하고 캐릭터를 매우 중요한 발견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데 유용해요. 그러나 내 영화라고 해서 꼭 반전된 엔딩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영화에서는 역습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영화의 결말부에 인물에게 뭔가 ‘거대한’ 경험이 찾아오는 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 깜짝 반전은 이제 아메나바르라는 이름의 브랜드가 되어서, 없다면 실망할 텐데요.

하지만 관객만 생각해서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니까요. 자신을 위해서, 남들이 나와 소통해주길 바라며 만드는 거죠. 스토리에는 일정한 자극성이 필요하다고 믿고, 항상 스스로를 관객의 입장에 세우려고 노력하지만 영화에 어떤 트레이드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전작을 능가하는 것, 더 큰 쇼크를 주는 것이 영화만들기의 목표는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태도를 갖는 겁니다.

- 어쨌든 당신에게 무엇보다 큰 영화의 매혹은 스토리텔링 자체로 보입니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강한 애착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거죠.

글쎄요. 어렸을 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가 지은 이야기들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게 시작입니다. 아주 꼬맹이였을 때부터 작은 키보드를 갖고 놀면서 내 이야기에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요. 영화는 거의 경험 못했어요. 극장 구경을 가지도 않았고 부모님은 TV 오래 보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특별히 엄했다기보다 나와 동생의 상상력과 내면적 세계를 키워주시려는 의도였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10살 때 TV로 영화를 본 이후 흥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영화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요. 런던의 공항에 근무하죠.

- <오픈 유어 아이즈> 이후 <디 아더스>까지 4년이나 걸렸군요.

만으로는 3년 정도예요. 영어로 찍기로 결정하고 배경인 채널 아일랜드의 역사를 끌어들인 다음, 각본을 미라맥스와 톰 크루즈에게 보내 긍정적 반응을 얻었습니다. 2편의 영화를 먼저 찍어야 했던 니콜 키드먼을 1년 반 이상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랑루즈>가 계속 지연된 데다 크랭크인 뒤에도 니콜의 무릎에 문제가 발생했지요.

- 그 3년은 영화감독으로 중대한 경험의 시간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대스타와 작업하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스페인 국민, 영화인 모두에게 대단한 사건이었고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약간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상호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디 아더스>는 두명의 대스타가 연루된 인디영화였고 내 영화로서는 가장 예산이 큰 프로덕션이었던 동시에, 적은 수의 사람과 함께한 가장 조용하고 친밀감 넘치는 프로덕션이기도 했습니다. 안개 표현을 위해, 고딕영화에서 <미션임파서블>까지 열심히 봤다

- 모든 영화를 어둠 속의 보이스 오버로 시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만든 세편의 영화들은 각기 그럴 만한 핑계가 있어요. <떼시스>는 (폭력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 영화로, 캄캄한 첫 화면은 관객에게 눈으로 보지 않을 때의 효과를 피부로 느끼게 합니다. 영화에서 앙헬라와 체마가 불이 나간 터널을 헤매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죠. 말 되죠? (웃음) 그리고 <오픈 유어 아이즈>는 인식의 문이 열리는 것, 각성에 대한 영화고 <디 아더스>는 빛을 다루고 있으므로, 암흑은 자연히 중요합니다.

- 스타일면에서 볼 때 <디 아더스>의 시각적인 연출은, 스릴러로서는 상당히 과묵한 편입니다. 당신과 촬영감독 하비에르 아기레사로베가 합의한 규칙이라도 있었나요.

컬러에 대해 특히 많이 상의했습니다. 나는 사운드에는 밝지만 조명 같은 부분에는 과문해서, 빛과 색에 관해서는 하비에르의 직관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냥 분위기에 맞춰 광량이 많으냐 적으냐 정도만 의견을 냈죠. 거의 모노톤으로 영화를 구상하면서 회색 계통의 색들을 많이 연구했고 인물도 배경으로부터 간신히 얼굴을 구분할 정도로 찍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디 아더스>를 흑백영화로 만들 생각은 없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원래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건 상업적으로 너무 위험했겠지요? 결국 우리는 영화를 컬러로 찍되 최대한 창백하게 찍었습니다. 모든 세트를 회색으로 칠하고 의상을 고른 다음부터는, 하비에르의 훌륭한 심미안을 그대로 따르는 걸로 족했습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디 아더스>는 확실히 나의 전작들에 비해 절제된 표현을 썼습니다. 연출자로서 다른 식의 언어를 터득하고도 싶었고 <디 아더스>에 내가 원한 고전적인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래야 했습니다.

- <디 아더스>에는 날아다니고 벽을 통과하는 유령을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전무하지만, 보이지 않는 특수효과는 꽤 있을 겁니다. 후반작업 단계에서 공들인 부분이라든가.

나는 요란한 특수효과의 공포영화는 일정 시간 지속되는 인상을 남기긴 해도 심리적 충격을 주거나 여운을 남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발견했습니다. 관객의 상상력과 공포를 투사하게 하는 편이 훨씬 무섭고, 그점에는 프로듀서들도 동의했어요. 스튜디오에서 찍은 모든 장면을 디지털 기술로 손봤습니다. 외관 신에서 블루스크린, 모션컨트롤 촬영으로 인물과 합성한 컴퓨터그래픽 안개와 진짜 안개를 고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까다로운 특수효과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안개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빛은 다른 영화에서 주로 치유하는 힘으로 묘사되지만 내 영화에서는 죽이는 힘입니다. 반면 어둠은 아이들에겐 안전을, 그레이스에겐 강한 믿음,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막을 뜻하지요. 집을 둘러싸고 있는 회색의 안개는 불완전한 이해, 혼돈, 그레이스가 영화 끝에서 다다르는 불가지론을 비유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안개를 표현하기 위해 고딕영화에서 <미션 임파서블>까지 열심히 봤죠.

- <디 아더스>는 어찌보면 건물은 사람처럼, 사람은 정물처럼 찍었다는 느낌도 주더군요. 예컨대 넓은 저택의 방 안을 카메라가 비질하듯 훑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언제나 가장 표현력 있는 특정한 시점숏을 쓰려고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단순미와 통했습니다. <디 아더스>를 다 찍고 난 지금, 내 영화에 강력한 영향을 준 세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앨프리드 히치콕과 스티븐 스필버그, 스탠리 큐브릭입니다. 특히 큐브릭에게 제일 중요한 컨셉은 단순성입니다. 그의 매너를 따라 그냥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모든 움직임과 시점에는 정당하고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노력했습니다.

- 세 감독의 영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큐브릭은 앞서 말했듯이 효율적이고 단순미가 넘치는 카메라 시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히치콕에게서는 관객과 서스펜스를 통해 커넥션을 맺으려고 하는 노력을 배웠고, 스필버그는 관객의 심리와 감정을 자유자재로 유도하고 감상자의 위치에서 사고하며 자기가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영향을 주었지요. 히치콕 영화 중에는 <싸이코> <현기증> <이창>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큐브릭 영화 중에는 <풀 메탈 자켓> <샤이닝>을 손꼽겠습니다. 스필버그는 몇편의 영화를 따로따로 좋아하다 같은 감독이 만든 것임을 발견했던 최초의 감독입니다. <레이더스> <ET>는 대단하고 <죠스>는 음악이 최고지요. <쉰들러 리스트>도 훌륭한 영화예요. <결투>는 아주 어렸을 때 봤는데, 별로 맘에 안 들어하신 부모님 앞에서 동생과 몰래 “너무 좋다!”는 눈짓을 나눈 기억이 납니다. 스필버그 영화의 문제는 일부는 걸작이고 일부는 처진다는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굉장한 영화지만 앞뒤 부분이 영화를 값싸게 만들어버렸지요. <A.I.>도 좋은 영화지만 은유로 함축해도 좋을 내용을 긴 대사로 풀었다는 점이 싫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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