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지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
2012-02-16
글 : 장영엽 (편집장)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워 호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컴버배치(Cumberbatch): 1. 트렌치코트를 유행시킨, 매우 섹시하고 매력적인 남자. 2. 자기를 주목받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불평하고 과도한 나쁜 기질로 종종 따돌림을 받는 남자. 3. 머리숱이 너무 많아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남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은어 사이트 ‘어반 딕셔너리’의 검색 결과다. 어쩐지 오이를 연상시키는 이 단어가 원래부터 존재했느냐 묻는다면, 물론 아니다. ‘컴버배치’는 2010년 혜성처럼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로부터 파생한 명사다. 어반 딕셔너리는 친절하게도 이 명사의 동사 활용법(간단하게 ‘컴버배치드’(Cumberbatched)다)과 더불어 ‘컴버비치’(Cumberbitch)라는 단어 또한 소개하고 있는데, “멋지고 아름다우며 재능 넘치는 영국 배우” 컴버배치를 사랑하면 누구나 컴버‘비치’라 불리는 나쁜 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지금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라는 거다.

21세기 셜록, 스크린도 홀리다

‘컴버배치 신드롬’의 진원지는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다. 프록코트를 입고 스마트폰, 랩톱 등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믿을 수 없이 빠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남자.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BBC> 드라마 <셜록>을 통해 19세기 명탐정 셜록 홈스를 21세기로 소환해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캐릭터를 맡았으니 인기도 자연히 따르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70여명의 배우가 TV와 영화에서 셜록 홈스를 연기했고 모두가 컴버배치 같은 성공을 거둔 건 아니었다. 셜록으로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가장 큰 매력은 그가 지닌 개성에서 비롯된다. 컴버배치의 긴 얼굴과 들창코,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은 코난 도일의 원전 속 홈스와 거리가 있음에도 정서적으로는 가깝게 느껴진다.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홈스의 비사교적이며 거만한 일면을 한층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고유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홈스의 개성으로 믿게 한다는 점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장점이다. 특히 얼마 전 방영된 <셜록> 시즌2에서 그는 아이린 애들러와 애증의 관계를 넘나들며, 모리아티와의 최후 대결에선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내며 셜록 홈스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펼쳐 보였다.

컴버배치의 셜록 홈스는 세 번째 시즌을 기약해야겠지만, 그의 모습을 앞으로도 종종 목격하게 될 것 같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지난해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둔 대니 보일의 연극 <프랑켄슈타인>에 빅터 박사, 크리처 역으로 출연했고 최근 국내 개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워 호스>에도 이름을 올렸다. 연말 개봉작으로는 피터 잭슨의 대작 블록버스터 <호빗: 뜻밖의 여정>이 있으며 최근엔 J. J.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 더 비기닝2>에 악당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낯선 경험이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내게 기대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말이다. …중략… 유명세가 가장 중요한 건 아닐 테지만, 배우로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셜록>의 인기가)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스티븐 스필버그가 <워 호스>에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캐스팅할 당시 <셜록>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필버그가 그를 낙점한 까닭은 컴버배치가 일련의 시대극 영화, 드라마에서 보여준 안정된 연기력 때문이었는데, 과연 거장의 선견지명은 대단하구나 싶다. 컴버배치는 <셜록> 이전에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한 <BBC> 드라마와 영국을 무대로 삼은 시대극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호킹>의 스티븐 호킹, <반 고흐: 페인티드 워드>의 반 고흐와 스칼렛 요한슨의 어수룩한 첫 남편으로 등장하는 <천일의 스캔들>, 영화의 중요한 비밀을 쥐고 있는 <어톤먼트>의 초콜릿 회사 사장 등이 그가 맡았던 역할이다. <워 호스>에서도 컴버배치는 기품있는 영국군 대위 스튜어트로 분해 짧지만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한다. 독일군 진영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던 스튜어트가 모든 부대원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없이 칼을 떨어뜨리는 대목은 <워 호스>의 가장 서늘한 장면이다.

“난 굉장히 느리게 발전하는 타입”

한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개성보다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컴버배치는 조지 스마일리의 가장 믿음직한 조력자인 피터 길럼을 연기한다. 원작에서 북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파이로 알려진 길럼을 이해하기 위해 컴버배치는 자비를 들여 모로코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혼자 에사우이라의 밤거리를 걸었다. 길럼이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상상하면서.” 냉전시대의 공기를 머금은 듯 고요하고 스산하며, 총보다는 서류가 익숙한 스파이들을 다루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영화에선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다른 배우들에 묻혀 존재감을 잃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을 텐데 컴버배치는 이러한 과제를 꽤 만족스럽게 수행해냈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컴버배치에게 그건 셜록 홈스일 것이다)로 이름을 얻은 뒤 그 이름을 무덤 삼아 서서히 잊혀져간 배우들의 전철을 이 남자는 밟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중요한 영화다.

<호빗: 뜻밖의 여정>이 개봉하는 12월엔 골룸 역의 앤디 서키스와 함께 모션캡처 배우로서 자웅을 겨루는 컴버배치를 목도할 수 있게 된다.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난쟁이들의 터전을 잠식한 사악한 용 스마우그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했던 네크로맨서다. ‘호빗’ 빌보 배긴스(재미있게도 <셜록>의 왓슨, 마틴 프리먼이 빌보를 연기한다)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등장할 스마우그를 위해 컴버배치는 런던 동물원을 돌아다니며 코모도 도마뱀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했다. 어쩐지 스마우그를 보는 순간, 얼굴에 센서를 붙이고 근육을 실룩거리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모습이 겹쳐지리란 생각이 든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 런던 곳곳의 연극 무대에서 차분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가 서른이 훌쩍 넘어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는 이 남자의 행보에 어리둥절할 만도 하다. 하지만 배우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티모시 칼튼과 완다 밴덤 사이에서 태어난 컴버배치에게는 배우의 유전자가 저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난 굉장히 느리게 발전하는 타입”이라 여기는 컴버배치에게 명성과 성공의 속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야심까지 느긋하다 여기진 말자. 당분간 “제임스 맥어보이와 마이클 파스빈더와 벤 위쇼”가 그랬듯, 규모있는 영화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는 것이 배우로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소망이니까. 과연 컴버‘비치’다운 태도다.

사진 SPBV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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