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크코트>의 신아가, 이상철 감독을 개봉 즈음하여 두번 만났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인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의 분위기가 달랐다. 개봉 직전 만났을 때 기운차 보였던 그들이 두 번째 만남에선 좀 풀이 죽어 있었다. 완성도가 좋다는 독립영화계의 일반적인 평판과 별개로 이 영화는 관객을 많이 불러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연을 맡은 황정민씨의 상반신을 크게 잡은 포스터만 봐도 <밍크코트>가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진 않는다. 가족문제를 정직하게, 색다르게 다뤘다는 결기 같은 게 풍기지만 이 포스터만 봐서는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기 어렵다. 하니, 이 영화의 흥행이 실망스러운 것은 마케팅의 요인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수상작으로서 프리미엄을 기대한 것치곤 극장에서 대접이 소홀했으나 신아가, 이상철 감독의 재능이 그렇게 흘려보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 장편 데뷔작으로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재능의 소유자들로 보였다. 두 사람이 언제까지 공동연출을 할지는 알 수 없으나 신아가 감독이 현장 지휘를 한, 실제로 연출을 한 이 작품과 달리 두 번째 영화에선 신아가 감독이 조력자로 뒤로 물러서고 이상철 감독이 현장 지휘권을 가질 것이라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하지만 그들의 공동작업의 한시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내가 주목한 것은 <밍크코트>가 이들의 작가적 성향을 온전히 드러내는 작품은 아니며 우연찮게 떠오른 착상을 밀고나가 마침내 완성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그들이 사석에서 고백했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세부묘사의 힘, 하지만…
신아가 감독이 직접 주변에서 겪은 가족사의 경험 일부를 확대해 허구의 스토리로 늘려 창작한 <밍크코트>의 장점은 캐릭터와 세부묘사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우유배달을 하는 현순이 등장할 때 그녀는 사은품으로 믹서를 받고도 우유를 끊으려 하는 어느 경우 없는 가정주부의 집에 쳐들어가 작동 중인 믹서를 들고 나온다. 항의하는 상대의 외침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나오며 현순은 욕을 중얼거린다.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현순의 이 첫 등장 장면이 주는 잔영은 영화의 전개 내내 쭉 깊어지고 넓어진다. 의사에게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어 가망없다는 말을 전해 들은 현순의 언니와 동생 내외가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려 하자 결사항전하는 현순의 모습은 애틋하다기보다는 기괴하다. 그게 이 영화의 주된 힘이다.
현순은 어머니의 병상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를 하며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의사를 비롯한 병원 직원들에게도 안하무인이다. 현순은 자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선택받았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은 그녀의 초라한 위치, 가족 내부에서조차 한번도 존중받지 못했던 얇은 위치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더 세게 외부에 표출된다. 무식하고 가난하지만 주위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존감을 유지하려 하는 현순의 단단한 껍데기는 세기와 강도만 다를 뿐 현순의 다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인 현순의 언니 명순, 동생 준호와 경숙 부부 모두 얼마간 선한 의도를 갖고 있으나 속물적이며 이기적인 면모를 숨기고 저마다 자신들에게 결점이 없는 체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현순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저마다 껍데기를 스스로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 대목이 좀 문제가 된다. 정연한 극영화의 논리를 바탕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들이 비슷한 시점에 화면에 쏟아진다. 정보량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각 인물들이 껍데기를 벗어던지기 때문에 관객은 당황할 수도 있다. 인공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감독도 그걸 의식했는지 결말부에선 생략과 공백의 여지를 남겨주는 방식을 택한다. 현순의 젊은 딸이자 임신부인 수진이 위선적인 어른들 틈에서 기 센 척 버티다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뒤에 수술을 마치고 회복될 때, 그 경과는 영화에서 건너뛴다. 병상에서 의식을 회복한 수진이 주위를 둘러볼 때 침대 옆에서 현순이 자고 있는 것을 본다. 그전에 수진은 현순의 어머니, 곧 자신의 외할머니가 병상에 찾아오는 환상을 본다. 외할머니의 환상이 사라지자 수진은 자신의 어머니 현순을 보는데 현순은 세상 모르게 쿨쿨 자고 있다. 화면에는 빗소리가 옅게 깔린다.
결말을 포함한 이 후반부에서 관객은 당최 감정을 어느 쪽으로 수습해야 할지 헷갈린다. 일례로, 수진과 현순의 병실장면에서 낮게 깔리는 빗소리가 주는 감정은 모호하다. 그들이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인지 어쩔 것인지 확신을 주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잘 살 것이다. 무척 강인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에선 그들이 자신들의 캐릭터대로 살아가리라는 기대와 더불어 여전히 그들의 삶의 주변은 순탄치 않을 것이란 암시를 굳이, 남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전에 현순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절대자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그동안 행세했던 예언자 같은 태도를 반성하며 큰 좌절을 느낀다. 현순은 절대자가 하는 말을 자신만 받는다는 생각으로 오만해졌고 다른 가족들에 대한 상처와 원망을 우월감을 행세하며 보복하려 했다. 딸 수진이 불행에 처한 순간, 현순의 오만은 깨지고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병원 옥상에 올라갔을 때 하늘에선 눈이 내린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적이 내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장면에서도 <밍크코트>의 두 감독은 해석을 열어놓는다. 꽉 짜인 해결책을 제시해 인물들 모두 자기 회개에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그게 정말 그분의 섭리에 따른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다만 내 의심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감독들의 직관에 따른 상상인지, 앞뒤를 정교하게 계산하고 만들어낸 픽션인지 애매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못되게 구는 여자로 비치겠지만 생기발랄하고 거칠 것 없었던 현순의 모습이 허물어져내릴 때, 다른 식구들이 저마다 자기 인생의 못난 점을 절실하게 느끼며 오열할 때, 그 계기로 주어졌던 절대자의 섭리, 그에 따른 종교적 분위기의 반전은 이야기에 마치 우연인 것처럼 끼어든다. 그들이 은혜를 입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열린 태도, 혹은 비겁함
열린 태도로 내러티브를 짜는 것은 리얼리티에의 복종이라는 명제를 전제한다. <밍크코트>의 경우에는 약간 모순이 있다. 정연하게 기승전결을 맞춰놓고 결말부에서는 그게 인과적 상황은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는 듯이 보인다. 좋게 말하면 유연한 열린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하고 계산적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순간에 전환의 계기를 맞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면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는 장르의 규칙 준수라는 면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놓았으면 창작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관객에게 위로를 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회의와 성찰을 던져주려면 그렇게 하고 그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밍크코트>는 후반부 이후 그 절실함이 옅어진다. 전형적인 이야기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좌판을 벌여놓았으면서도 골라갈 것은 관객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 모호함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된 이유가 재능 충만한 신아가, 이상철이라는 젊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직관에 끝까지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뭔가 인물들을 안전한 울타리에 가둬놓고 나서 관객에게 우리는 모르는 일이에요, 라고 딴청하는 듯한 느낌인데, 좀더 직관을 따랐더라면 결말부가 그렇게 일목요연하지 않아도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뻗어나갔거나 적어도 인물의 일관된 생명력은 지금보다 훨씬 활달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관객에게 다가오며 연기의 수준뿐만 아니라 연출 호흡도 세련되게 통제된 이 주목할 만한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끝을 보지 못했다는 흔적 때문이다. 이게 순전히 개인적인 단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다음 영화에서는 신아가, 이상철 감독이 좀더 대담해지고 분방해졌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