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보다 시트콤을 더 좋아한다. 로맨스보다 코미디가, 그중에서도 블랙코미디가 좋다. 사랑에 목숨 거느니 사소한 데 목숨 거는 인간들에 더 감정이입하고, 주인공들이 운명의 거대한 파도와 맞서 싸우는 것보다 일상의 찌질한 순간들에 맞부딪히는 이야기에 끌린다. 물론 이렇게 ‘안 팔리는’ 이야기나 ‘못 나가는’ 사람들을 TV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김병욱 감독의 <하이킥> 시리즈나 tvN <막돼먹은 영애씨> 정도가 드물게 맥을 이을 뿐이었던 국산 페이소스의 공급자로 얼마 전, 또 하나의 ‘진짜’가 나타났다.
MBC에브리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년 인터넷을 통해 동명의 인디 시트콤을 공개했던 윤성호 감독의 새 버전 시트콤이다. 번뜩이는 재기와 홀롤로한 감성을 동반한 <은하해방전선>이나 <도약선생> 같은 그의 영화를 미처 예습하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윤성호 감독이 직접 밝힌 “위대한 미드 <오피스>가 선조, <막돼먹은 영애씨>가 이모, 김병욱 감독의 시리즈들이 고모부”라는 출생의 비밀대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겉보기엔 평범하고 멀쩡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골 때리게 웃긴 인간사를 제대로 그려내는 모처럼의 작품이다.
다 쓰러져가는 해병대 컨테이너를 사무실로 쓰는 연예기획사 ‘희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파워 없는 매니저, 의리 없는 배우, 눈치 없는 인턴, 센스 없는 광고주 등이 콩 한쪽까지 나눠먹기는커녕 네 것 내 것 따지는 치사함의 극단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최대의 웃음 포인트다. 포스터에 들어가는 이름 글자 크기에 집착하는 배우도, 인턴에게 퇴직금으로 P2P 사이트 다운로드 이용권을 주는 대표도, 친구 회사의 탕비실을 사무실로 쓰며 엉겨붙는 매니저도, 누구 하나 찌질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 ‘두근두근 자영업’이라는 에피소드 제목대로 스스로 벌어먹으며 사는 것의 만만찮음을 겪다보면 다들 깨닫게 되지 않나. 때로는 눈 딱 감고 좀 치사해지고 쪼잔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게다가 딱 봐도 졸부에 건달이지만 IT, 토익, 3D 등을 강박적으로 구사하며 최신 트렌드에 집착하는 사채업자, 해병대복 입고 다니며 흰 봉투에 곱게 넣은 ‘건축헌금’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컨테이너 주인집 여사님 등 처절하게 디테일이 살아 있는 캐릭터의 향연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88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령이다. 나이가 드니 원로배우 상대역만 들어온다면서 속상함을 토로하다가도 “같은 여자로서 이해한다”는 구 대표(박희본)에게 정색하며 “아니지. 같은 여자는 아니지. 나는 미스코리아 출신이고 거기다 진이었는데. 미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진이었는데 자기가 그런 기분을 어떻게 알아?”라고 또박또박 따져 묻는 그의 미모는 과연 진답게 황홀했고, 나는 웃다가 말 그대로 ‘미추어 버릴’ 뻔했다.
그러나 <온에어>나 <최고의 사랑>이 그렸던 방송계와 연예계의 이면에서 더 나아가 그 바닥과 틈새, 변방을 훑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세계는 과장 대신 관찰이, 소소해 보이지만 당사자는 물러설 수 없는 딜레마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대중은 연예인들의 대부업 광고 출연을 비난하지만 기왕 할 수밖에 없다면 ‘대광 출사모’ 즉 ‘대부업 광고 출연을 사랑하는 연예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의 상처를 달래며 “시장경제 만세!”를 외치는 이들의 애환과 ‘갑’인 광고주의 막말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출송’을 불러대며 비위를 맞추는 구 대표의 절박함이 순간의 웃음 뒤로 잊혀져버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직 고작 첫회가 방송되었을 뿐인데 10부작이라는 사실이 벌써 아쉽고 시즌2 제작 여부가 궁금한 기분, 구 대표를 보고 ‘일본쪽 미시 느낌’이라며 첫눈에 반했던 윤 PD(황제성)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렇다.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보고 있으면 막 저까지 살아 있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