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그냥 영화로 보라’고 권했더니 반발이 심하다. 영화에서 허구 이상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외국에 있어 영화를 볼 형편이 안돼 공판기록의 주요 내용을 요약할 테니, 텍스트(공판녹취록)와 이미지(부러진 화살)가 서로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서들 판단하시라. 내 요약의 객관성을 의심하는 분들은 김명호 교수의 홈페이지(www.seokgung.org)에 들어가, 그가 올려놓은 기록들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판사, 법대로 하세요! 이게 재판이냐 개판이지.” 이 외침이 아마 영화의 주요한 메시지일 거다. 하지만 공판기록에 따르면, “법대로”를 외치면서 재판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정작 김명호 교수다. 사법부, 문제 많다. 하지만 감독이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소재를 택했다면, 그건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공판기록 속의 김 교수는 로빈후드보다는 현실에서 망상의 세계로 철수해버린 돈키호테에 가깝다.
수학문제 출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 때문에 해고됐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충분히 개연적이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법정에서 문제 삼는 것은 해임의 ‘동기’가 아니라 ‘근거’다. 대학에서 그를 해고할 때 사립학교법에 따른 교원임용규정의 특정한 조항을 사용했을 터, 그 ‘근거’가 타당하면 대학쪽의 행위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게 ‘사법’이라는 놀이의 규칙이다.
판결문은 김 교수의 학문적 성취는 인정한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그는 교수로서의 여러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으며, 평소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언사를 남발했다. 해임의 부당성을 주장하려면, 법정에서 자신을 향한 학생과 교수들의 증언을 반박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증언의 탄핵을 포기하고 자신의 주관적 철학만 설파했다. “교수는 공부만 잘 가르치면 된다.” 그러니 패소는 당연한 일.
재판이냐 개판이냐
석궁사건 관련 재판은 아예 한편의 사이코드라마다. 법정에서 자신을 “법학자”로 소개한 김 교수는 독학으로 습득한 법조문을 들이대며 판사의 재판진행에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이게 사법개혁의 슬로건으로 통하는 “판사, 법대로 하세요!”라는 외침의 실체다. 법정의 그는 재판의 ‘실체’에 충실하기보다는 재판의 ‘절차’를 물고 늘어지며 사법부가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 쇼맨십으로 일관한다.
가령 김 교수는 엉뚱하게 피해자의 통화기록을 요구한다. 판사가 ‘통화내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요구하느냐’고 묻자, 통신사에는 통화내용도 저장된다고 우긴다. 그의 억지에 못 이긴 판사가 그의 신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들로 공문을 보낸다. 거기서 보내온 답변. 1. 문의하신 전화번호는 우리 회사 것이 아닙니다. 2. 본사는 고객의 통화내용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허무개그가 아닌가?
명백한 증거도 일단은 부인한다. 혈흔 감정 결과를 내놓으면 그 피가 정말 피해자의 것인지 감정을 요청하잔다. “돼지 피”일지도 모른다나? 짜증이 난 판사 왈, “혈흔이 피해자의 것으로 입증되면 공소사실을 인정하겠냐. 그것도 아니지 않냐.” 그의 극성에 시달리던 판사, 차라리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라 권한다. 그러자 그건 아니란다. 1심 마지막 두 공판은 본인이 출석을 거부했다. 변호인도 안 나왔다. 이게 ‘변호인 없이 진행된 재판’의 실체다.
변호인의 방어논리
최후변론에 나타난 변호인의 방어논리는 크게 세 가지. (1) ‘범행의 결정적 증거인 부러진 화살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는 수사기관의 잘못이지 사법부의 실수는 아니다. 게다가 화살만이 범행의 유일한 증거던가? 판결엔 다른 증거들이 사용됐다. 가령 석궁으로 발사연습한 것, 회칼을 챙겨간 것, 현장을 사전답사한 것, 범행 뒤 “판사를 응징하려 했다”고 외친 점 등. 흉기만 은닉하면 완전범죄가 된다는 말인가? (2) ‘혈흔이 누구의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도 개그다. 김 교수는 피해자가 자해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해까지 한 사람이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왜 다른 피(가령 “돼지 피”)를 얻어다가 묻힌단 말인가? 바로 이 때문에 법원에서 그 신청을 기각한 것이다. 피해자의 피를 뽑아서 대체 뭘 증명하겠다는 건지. 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법원에서 혈흔 감정을 기각했다!” 얼마나 선동적인가? (3) ‘피 묻은 옷가지가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이게 김 교수쪽이 펴는 변론의 수준이다. 그렇다면 박 판사의 몸에 난 상처는? 그 상처도 남의 상처란 말인가? 그들은 왜 와이셔츠에만 혈흔이 안 묻었냐고 따진다. 그건 김명호 교수한테 물어볼 일. 피해자가 자해를 하면 그렇게 마술적 방식으로 셔츠에 피를 묻힐 수 있었을까? 셔츠는 노모가 빨았다고 한다. 그래서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거기서도 혈액의 DNA가 검출됐다.
실체와 절차
나머지는 절차에 관한 시비. 가령 석궁과 화살, 회칼, 다다미 등이 영장 없이 압수된 바, 신설된 규정에 따라 불법하게 수집한 증거이므로 배제되어야 한다나? 근데 판결문에 따르면, 압수 당시엔 그런 규정이 없었단다. 허무개그. 여기서 변론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김 교수는 압수된 석궁이 자신이 들고 간 그 석궁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우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다 받아주다간 재판, 30년 걸려도 안 끝날 거다.
김 교수는 자신의 행위를 사법살인에 대한 ‘국민저항권의 행사’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켜 박찬종씨와 같은 거물(?)이 변론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무슨 양심수에 대한 사회적 구명운동 비슷한 분위기랄까? 녹취록에는 방청객이 법정에서 야유를 보내다가 감치명령을 받고 끌려나가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 교수는 자신을 사법부에 저항하는 정의의 투사로 연출했다. ‘정의’ 대 ‘사법’의 대립.
문제는 김 교수의 주관적 ‘정의’가 보편성과 객관성을 얻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테러’이지 ‘의거’가 아니다. 재판의 ‘실체’는 모든 면에서 자기에게 불리하니, 남은 것은 ‘절차’를 문제 삼는 것. 자기가 독학한 “법대로!”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고, 사안과 관련없는 엉뚱한 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면 사법부가 편파적이라고 요란하게 외치는 국민저항권의 쇼뿐. 그러니 재판이 개판이 될 수밖에.
재판의 ‘절차’를 문제 삼아 ‘실체’를 흐리려는 피고의 정치적 쇼맨십에 잔뜩 짜증이 난 재판부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사건이랄까? 물론 일부 절차상의 실수와 법원이 짜증내는 장면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거기서 ‘사법부 오만함’을 보여줄 수는 있을 거다. 영화는 기술적 의미에선 모두 몽타주. 가령 한국 팀이 5:1로 패한 경기도 1:0 승리로. 물론 이 역시 재료 면에선 100% 실화일 거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화를 본 관객이 전하는 석궁재판의 상황은 공판녹취록 속에 기록된 그것과 180도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 자체야 정지영의 작품이니 잘 만들어졌겠지만, 영화를 본 관객이 내게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전한 것이라면, 이 워너비 ‘법정실화극’은 진실의 엄청난 왜곡이라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