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정영객잔] 무성의 형식은 영원하리
2012-03-01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영화언어의 본질과 장르의 진화과정에 대한 해례본 <아티스트>

<아티스트>가 무성영화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그 시절을 재현하는 영화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진실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완전한 무성영화가 아니며, 무성영화의 형식적 요소를 차용하여 영화사의 한순간을 해제(解題)하는 알레고리 텍스트로서 흥미를 자아낸다. <아티스트>는 한 무성영화 스타의 흥망의 자취를 따라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영화사(史)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에 ‘액션’과 ‘사운드’라는 영화언어가 대립하고, 갈등하며,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따라서 그것은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등장한 희귀한 무성영화도, 역사를 되살리는 재연드라마도 아니며, 영화에 소리가 없었던 시절로부터 소리가 영화와 융합하는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이 무성에서 유성으로의 이행기를 풀이하는 키워드는 ‘장르의 통합’이라는 관점이다.

영화사적 전환기에 대한 알레고리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기인 1927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아티스트>와 손쉽게 비교할 수 있는 영화가 하나 있다. 뮤지컬의 거장 진 켈리가 주연은 물론 스탠리 도넌과 공동연출까지 맡은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이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어 유성영화가 도래하자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한 여배우에 대한 희화화된 묘사가 나온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는 유성영화에 비해 열등한 표현양식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 의거하여 이 시기를 조명한다. 이같은 우생학적인 관점은 이 영화가 뮤지컬 장르라는 사실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영화의 역사에서 뮤지컬은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 그것은 사운드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은 토키 시대의 상징과 같은 장르가 아니던가. 뮤지컬의 탄생과 영화(榮華)는 사운드가 아니고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랑은 비를 타고>와 동일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되, 그 관점에서 <아티스트>는 반대 자리에 선다. 이야기의 종결부까지 무성영화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무성영화의 스타였다가 유성영화 시대에 몰락하는 주인공 조지 발렌틴(장 뒤자르댕)의 됨됨이는 그 자체로 영화의 테마를 구현하는 표상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뮤지컬 전성기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되는 히스테리컬한 여배우에 필적하는 인물이 <아티스트>에도 잠시 등장하는데, 그는 키노그래프사 사장 짐머(존 굿맨)가 조지에게 영화의 미래라며 보여주는 유성영화 필름에서 커다란 마이크에 매달려 우스꽝스럽게 대사를 읊어대는 여배우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여배우의 립싱크가 탄로나 만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처럼, <아티스트>에서 마이크에 수족이 묶인 그녀의 부자유스러운 연기는 조지의 비웃음을 산다. 그러나 <아티스트>에서 조지의 조소(嘲笑)는 그리 오래가지 않고 회한의 눈물로 변질될 뿐 아니라,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대미를 장식했던 해피엔딩은 <아티스트>에서 전혀 다른 경로와 관점을 경유하여 화해적 결말로 이행한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의 표현방식, 즉 대사가 들리지 않고 자막으로 말과 정황을 기술하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무성의 형식에만 종속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단지 영화의 말미에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배우들이 목소리를 얻게 된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소리는 영화에서 액션을 앗아갔다. 마이크에 연연하게 된 배우들은 점차 목소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사운드 도입 초기에 행동주의(activism)라고 부를 수 있는 액션과 제스처의 풍부한 뉘앙스는 실종되었다. 이 대목에서 <아티스트>의 인용과 차용은 고전에 대한 페티시를 넘어선다. 영화는 무성의 시대에 대한 고착과 노스탤지어에 몰두하기보다 영화의 역사에서 무성의 형식과 유성의 형식이 충돌하고, 서로를 애증하며, 궁극에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장르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조지와 페피의 여정을 따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 영화’인데, 1927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영화 안에 액자로 삽입된 이들 영화는 장르의 변천을 겪는다. <아티스트>가 열리는 것은 조지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그가 고문을 받으며 “말 못 해!”를 외치는 이 활극 코미디를 시작으로 영화 속 장르의 변천은 시작된다. 유성영화의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는 스타덤에 오른 페피가 주연을 맡은 일련의 스크루볼(로맨틱) 코미디들이 스크린을 채운다. 그리고 최종적인 귀결은 조지와 페피가 화합해서 연출하는 뮤지컬이다.

장르의 변천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 속 영화는 말보다 액션이 주요한 표현수단이었던 행동주의 희극의 시대를 지나 말이 중심이 된 구술 희극으로, 행동주의와 소리가 결합된 뮤지컬의 형태로 진화론적 경로를 그린다. 조지와 페피의 관계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에 충돌했던 두 가지 형태의 미학을 대변하는 알레고리이다. 존경과 우정에서 열패감과 연민으로 변하는 그들의 감정은 영화에 소리가 도입되기 시작할 무렵 영화인들의 내면에 소용돌이쳤던 감정의 격랑을 현시한다. 이들의 관계 안에는 단지 미학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장르의 죽음과 탄생, 신구 세대의 갈등, 돈을 좇아 움직이는 냉정한 자본의 속성이 한데 뭉뚱그려져 있다. <아티스트>는 지극히 표준적인 로맨스 플롯 안에 치밀한 방식으로 영화사의 역사적 전환기를 알레고리화한다. 무성의 형식과 유성의 형식을 표상하는 조지와 페피는 일시적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깊은 곳으로부터 서로를 그리워하며 동경하는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이들의 애틋한 로맨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성영화의 시대는 소리를 동경했으며, 유성영화의 시대는 소리 없는 액션(action)을 그리워했다. 조지와 페피를 연결해주는 애정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충돌과 반목이라는 표피적인 현상 저류에 흐르는, 두 가지 상이한 영화적 형식 사이의 긴장과 협상, 그리고 변증법적 진화를 은유한다. 이는 영화사를 진화나 발전의 계보학으로 기술하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이행이라는 사건을 달리 바라보게 만든다. 실제로 무성영화의 주요 미학들은 유성영화에서 사멸하지 않고 잔존하였고, 현대영화에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아티스트>는 행동주의로 요약되는 무성의 미학이 청산되거나 화석화되지 않고 어떻게 유성영화에 흡수, 통합되었는가를 저들의 로맨스를 통해 서사화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기화

조지가 신봉하는 무성영화의 가치는 보이는 이미지에 대한 자긍심에 기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긍심은 무성영화의 절정기를 초기 영화 미학의 황금기로, 유성영화의 등장을 예술로서 영화 미학의 퇴보로 인식하는 당대 이론가들과 무성영화 옹호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미학적 차이는 단지 소리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가의 문제로 치환되지 않는다. 무성영화는 소리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내재적 미학을 완성했으며, 이는 ‘사운드의 이미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스타일을 창조한다. 이를테면 <아티스트>에서 개가 짖는 신들에서 개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개의 짖는 행위가 유발하는 형상적 이미지는 개가 짖는 소리에 비견되는 효과를 창조한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같은 위대한 무성영화의 아티스트들은 사운드를 대체할 액션(행위)의 표현방식을 신체 연기를 통해 체현하고 있었으며, 이는 ‘사운드의 이미지화’ 또는 ‘청각의 시각화’로 부를 수 있는 무성영화 특유의 미학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소리의 존재 유무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차이라고 보기 힘든데, 도리어 둘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기화(synchronization)에서 찾아진다. 무성영화에서는 대사나 중요한 효과음이 자막으로 표현되어 순차적으로 전달된다. 무성영화는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를 이용한 트릭효과를 흔하게 사용한다. <아티스트>의 후반부에는 이러한 트릭을 위트있게 사용한 장면이 등장한다. 자살을 기도하려는 조지의 ‘액션’과 그의 자살을 막기 위해 전속력으로 자동차를 모는 페피의 ‘액션’을 교차편집하는 신에서, 위태롭게 두개의 액션을 오가다 조지의 입으로 삽입되는 총구의 클로즈업이 보여진 뒤 ‘Bang!’이라는 자막이 뒤따른다. 순간 관객은 자막 문구가 총의 격발음이라고 상상하지만 이어지는 숏에서 드러난 진실은 나무와 충돌한 페피의 자동차다. 이처럼 (자막으로 표현된) 사운드와 이미지의 인지적인 불일치는 채플린과 키튼으로 대표되는 무성영화 시대 행동주의 희극의 주요한 표현방식이었다. 이처럼 무성영화에서 이미지화된 소리는 늘 이미지와 동조화될 수 없었다. 배우의 대사는 동시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늘 말해진 뒤 자막으로 보여진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시성은 유성영화 초기 무성영화 관습과의 단절을 야기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아티스트>에서 마이크에 종속된 여배우의 제한된 행동반경처럼, 아직 채 발달되지 않은 사운드 시스템으로 인해 배우들의 액션은 정지되었고,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생기를 잃었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기화를 보장하기 위한 액션의 제한은 무성영화가 이룩해놓은 영화의 행동주의 미학을 저해하는 미학적 퇴보처럼 보였다. 무성영화에 대한 조지의 의심은 여기서 비롯되는데, 그는 시각적 예술로서 영화의 본질이 액션과 제스처의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아티스트>에서 조지와 페피의 흥망의 궤적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교차하는 두개의 선으로 형상화된다. 퇴락하는 조지와 부상하는 페피가 키노그래프사의 계단에서 마주칠 때,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조지(무성영화)의 운동과 아래에서 정상으로 상승하는 페피(유성영화)의 운명은 시각적으로 대조된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운명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가 서로 반목하던 초기의 논쟁적 양상을 연상시키지만 페피에 대한 조지의 실망이 본격화하는 와중에도 페피의 순정은 변치 않는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사이의 충돌과 애증을 은유하는 두 인물은 어떻게 로맨스의 목표점에 도달하는가? 달리 질문하면 무성영화의 행동주의는 유성영화의 리얼리즘과 어떻게 화합되는가? <아티스트>가 제시하는 결론은 액션을 위주로 한 장르와 소리를 위주로 한 장르의 변증법적 통합이다.

액션과 소리의 변증법적 통합, 진화

시종 사운드를 배제하던 영화 안에 소리가 개입하기 시작하는 종결부에서 조지와 페피는 영화언어의 진화가 도달한 하나의 절경을 연출한다. 전술한 것처럼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성기를 맞은 뮤지컬은 토키의 수혜를 받은 장르였다. 토키가 가져다준 사운드와 이미지의 동조화는 뮤지컬의 핵심요소인 춤과 노래의 결합을 가능케 했다. <아티스트>에서 뮤지컬로의 통합은 복선으로 깔리는데, 조지와 페피가 만나고,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단계들마다 춤과 노래는 그들을 맺어주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팬과 스타로 만난 페피와 조지는 영화 촬영장에서 엑스트라 와 주연배우로 재회하는데, 이때 조지는 세트 뒤에 가려진 페피의 춤추는 다리에 주목하고 둘은 함께 영화를 찍는다. 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불을 지를 때, 조지가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필름 깡통 안에는 페피와 커플이 되어 춤을 추는 영화의 NG컷들이 들어 있다. 급기야 마지막 장면에서 조지와 페피의 커플 댄스는 제작자 짐머로부터 “완벽해”라는 찬탄을 자아낸다. 영화 속 조지와 달리 실제 무성영화 스타들은 대부분 유성영화의 도래와 함께 퇴물 취급을 받거나 뮤지컬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사라졌다. 따라서 <아티스트>의 결론은 무성영화 스타들의 퇴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일종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조지와 페피의 로맨틱한 결합과 뮤지컬 스타로 거듭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현실 바깥의 판타지를 향하면서 영화언어의 이행기에 대한 가상의 재연극이 되는 것이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의 현신인 조지를 죽음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유성영화의 표상인 페피와 맺어준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여주인공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아티스트>에서 퇴물 무성영화 배우 조지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그의 춤(액션)이다. <아티스트>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를 연상시키는 둘의 탭댄스 장면을 통해 무성영화의 미학이 유성영화 시대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공고하게 연대하고 결합을 이루어냈음을 설파한다.

<아티스트>는 완전한 무성영화가 아니다. 영화 안에는 시종일관 엄격히 유지되던 무성영화의 형식을 깨뜨리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조지가 꾸는 악몽이다. 꿈속에서 조지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이 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공포에 질린다. 소리는 조지를 압도하고, 짓누른다. 이러한 조지의 심리적 공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깃털이 땅에 닿는 순간 들리는 폭탄이 터질 것 같은 파열음으로 형상화된다. 조지의 악몽신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갈등과 엇갈린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반부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성영화의 형식이 깨어지는 두 번째 계기이다. 후자는 전자와 뉘앙스 면에서 완연히 다르다. 현실화된 상황에서 소리는 마지막 댄스 시퀀스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등장하는데, 이 대단원이 전하는 감흥은 각별하다. 무성영화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신체의 언어를 통한 행동주의와 시각적 판타지는 무대 위에서 기꺼이 환상을 전시했던 초기 뮤지컬영화로 승계된다. 유성영화가 최초로 세상에 나온 1927년, 무성영화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티스트>는 하나의 미학이 소멸하고 다른 것이 그들을 대체하는 기계적 진화론이 아니라 변증법적 진화론의 역사로 영화사의 한순간을 풀이한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페티시즘에 집착하는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영화언어의 본질과 장르의 진화과정에 대한 해례본이다. 무성영화는 영화사의 특정한 시기에 존속했다 사라진 사멸한 유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재현’의 대상이 아니다. 무성의 형식은 행동주의와 스펙터클의 미학으로 죽지 않고 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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