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발리우드의 현재를 보는 최적의 시간
2012-02-29
글 : 김도훈
인도대사관이 주최하는 ‘인도영화제 2012’, 3월1일부터 6일까지 CGV압구정에서
<파이팅 인도!>

인도영화에 대해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영화 중간중간 음악과 춤이 곁들여지는 마살라영화. 3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데다가 중간 휴식시간까지 있는 어마어마한 상영시간.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몇명의 (우리 구미에는) 지나치게 섹시한 남자배우들이 지배하는 업계. 자기만의 질서와 규칙을 오랜 전통과 버무리며 존재해온 작은 소우주. 다만 지난 몇년간 한국에 개봉한 몇몇 영화들, 특히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청원>과 <블랙>은 인도가 우리의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는 모던한 대중영화도 만들어내는 세계라는 걸 증명해왔다. 하긴 샤티야지트 레이와 미라 네어의 전통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발리우드영화라고 꼭 옴 샨티 옴을 외치며 무뚜와 함께 춤을 출 필요는 없단 소리다.

문제는 <청원> <블랙> <세 얼간이>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하는 인도 대중영화가 극도로 드물다는 사실이다. 못내 아쉬운 관객이라면 주한 인도대사관이 주최하고 CJ CGV, 무비꼴라쥬와 인도정보통신부가 후원하는 ‘인도영화제 2012’는 확실히 놓치기 힘든 기회다. 3월1일부터 6일까지 CGV압구정에서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제작된 여섯편의 인도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주한 인도대사관에 따르면 “인도영화의 최신작 중 역사물을 비롯해 오늘날 인도인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정”했단다. 이번 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을 잘 살펴보면 전통적인 마살라영화는 일부러 제외한 느낌이 강하다. 국제적으로 통용될 만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현대적인 인도영화를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달까. 지금 인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내는 영화들이 많은 것도 흥미롭다.

아미르 칸, 샤룩 칸을 잇는 스타 리틱 로샨

상영작 중 절반에 해당하는 세편의 영화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건 특히 짚고 넘어갈 만하다. 닐라 마드합 판다의 <나는 칼람>(I Am KALAM)은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도시 외곽의 식당에서 일하는 소년이 독학으로 스스로의 앞길을 개척해나간다는 내용을 담은 소품이다. 감독은 관광지로 유명한 라자스탄 지역을 무대로 인도 어린이들의 교육과 계급차별 문제를 가벼운 코미디의 기운을 통해 보여준다. 다른 두편의 영화는 <나는 칼람>보다 훨씬 세련된 대중영화의 방식으로 독특한 사회문제를 다룬다. R. 발키 감독의 <아버지>(Paa)는 12살이지만 60대 노인처럼 보이는 선천성 조로증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신파 멜로 드라마다. 부패한 인도의 언론과 정치인들을 양념처럼 끼얹는 이 영화의 진정한 볼거리는 인도 최고의 배우이 자 제작자 중 한명이며 <블랙>의 주인공이기도 한 아미타브 밧찬이 특수분장을 하고 펼치는 조로증 소년 연기다. 아미르 칸이 직접 연출한 <지상의 별처럼>(Taare Zameen Par)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상영작 중 가장 돋보이는 수작으로, 난독증을 앓는 8살 소년이 아미르 칸이 연기하는 미술선생을 통해서 정신적 장애를 딛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인도 대중을 위해 눈높이를 낮춘 캠페인영화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꿈결 같은 화면이 인상적이다.

<지상의 별처럼>

아미르 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인도영화제를 찾는 많은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발리우드 슈퍼스타들의 연기를 목도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지상의 별처럼>이 ‘3대 칸’ 중에서도 조금은 현대적인 이미지를 가진 아미르 칸의 장점과 연출가로서의 야망이 드러난 영화라면 <파이팅 인도!>(Chak De! India)는 샤룩 칸의 대중적 스타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밀어붙이는 영화다. 샤룩 칸이 연기하는 인도 국가대표 하키팀 주장 ‘칸’은 파키스탄에 패배한 뒤, 그가 모슬렘이어서 파키스탄에 유리한 경기를 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고향마저 등지는 신세가 된다. 7년 뒤 인도로 돌아온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오합지졸의 여자 하키팀 감독을 맡아서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파이팅 인도!>는 직설적으로 인도의 지역 화합을 외치는 영화다. 주인공은 언어도 문화도 다른 인도 각 지방에서 뽑힌 16명의 선수들을 ‘인도’라는 이름 아래 화합시키려 노력하고, 다양한 갈등은 할리우드 스포츠영화의 공식 속에서 멋지게 봉합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인도 버전을 생각하면 어떤 영화인지 쉽게 감이 올 거다.

<조다 아크바르>

아미르 칸과 샤룩 칸을 잇는 새로운 남자배우가 궁금하다면 시대극 <조다 아크바르>(Jodha Akbar)는 최적의 선택이다. 인도영화 팬이라면 이쯤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3대 칸’의 명성을 위협하는 인도의 슈퍼스타 리틱 로샨이다. <조다 아크바르>에서 리틱 로샨이 연기하는 16세기 무굴제국의 황제 아크바르는 정치적 동맹을 위해 힌두 공주 조다를 왕비로 받아들인 뒤, 그녀의 사랑에 힘입어 성군으로 변해간다.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의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연상시키는 리틱 로샨과 아이쉬와라 라이의 환상적인 궁합만이 <조다 아크바르>의 장점은 아니다. 수천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어마어마한 스펙터클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름다운 시대극이 세계를 휩쓰는 중화권의 시대극에 맞서겠다는 발리우드의 야망이 집약된 작품이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다. 3시간30분의 상영시간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모든 상영작은 무료

<일어나, 시드>

물론 모든 상영작을 다 추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갑부 아버지의 돈을 쓰면서 파티나 하고 살아가던 대학생의 자아찾기를 다루는 <일어나, 시드>(Wake Up Sid)는 조금 함량 미달의 영화다. 서구의 트렌디 드라마를 위악적으로 흉내내는 이 2시간20분짜리 영화를 굳이 봐야 할 이유가 뭐냐고? 그런데 잘 생각해보시라. “일주일만 내 회사에서 일하면 포르셰를 사주겠다”는 갑부 아버지의 제안도 못 견디고 집을 뛰쳐나간 뒤 혼자 고생하다가 자아도 찾고 사랑도 얻는 스무살 인도 청년의 이야기를 또 언제 볼 기회가 있겠는가 말이다. <일어나, 시드>는 발리우드가 서구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관습을 어떤 식으로 도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드문 기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도영화제 2012’는 모든 작품이 무료로 상영된다. 절약한 티켓값으로는 영화관 근처의 인도 식당을 예약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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