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계수] “연애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아닌가”
2012-03-0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러브픽션> 전계수 감독

연애와 연애의 감정에 관한 다양한 곡절이 담긴 <러브픽션>을 보고 나면 누구나 이렇게 묻게 된다. 감독의 실제 연애 경험담은 얼마나 반영됐을까. “멜로영화나 로맨스영화를 찍은 감독들이라면 자신이 연애하며 느꼈던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 혹은 반성해야 할 것들까지 녹여넣으려고 하긴 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러브픽션>은 나의 실제 연애담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전계수 감독의 말이다. 듣고 보니 좀 이상하다. 시사 직후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이건 전적으로 나의 연애담이고 과거 여자친구들을 울린 반성의 의미에서 제작했다”는 말과는 상반되지 않은가. 전계수 감독은 그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속사정까지 자세히 밝히기는 어려워도 하여간에 그 말 때문에 요즘 많이 곤혹스럽다고도 했다. 이제라도 제대로 정정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러니 바꿔주자. <러브픽션>은 감독 전계수의 실제 연애담이 아니라 감독 전계수의 연애에 관한 상상이다. ‘이게 바로 나의 연애담이다’로 알려졌던 <러브픽션>은 ‘이게 바로 내가 연애로 느낀 것이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그렇게 보는 편이 훨씬 흥미롭다.

-아이디어들은 어떻게 모았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식 소설 삼부작이 있다. 그 소설들에는 내가 무릎을 치며 공감할 만한 연애에 관한 직관과 단상들이 있었다. 이런 태도로 로맨스영화를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7년이었다. 나 스스로 멜로나 로맨스는 잘 못하는 편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나. 로맨스나 멜로는 좋아하든 싫어하든 습작으로라도 써봐야 한다고. 그런데 쓰면 쓸수록 애절한 이야기는 안 나오고 자꾸 웃기는 쪽으로만 가더라. (웃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객관적인 연애 해부학으로서 상당한 성과를 이룬 작품이다. 그것처럼 해보고 싶었다. 연애로 허우적거리는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그릴 때 어떻게 그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날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간에 쌓였던 연애에 관한 느낌과 생각이 반영되었을 텐데, 지금쯤은 연애에 관하여 무언가 거리를 두고 말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 것인가.
=그런 것 같다. 연애 당시에 그 주인공들은 세상에서 자신만이 가장 가슴 아픈 것처럼 굴지만 바깥에서 볼 때 자기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인식하지 못하지 않나.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때의 내가 나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지 않나. 유명한 역사학자의 말처럼 역사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그건 연애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가 무언가 ‘민망한 상황’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생각하는 코미디의 원천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런 민망한 상황에 대한 예민한 공감이 내게 있다. 다른 웅장하고 숭고한 가치들보다 그쪽이 항상 앞선다. 이번에는 전적으로 코미디 장르에서 그렇게 해본 것이지만, 앞으로 다른 장르를 만들 때에도 그런 면이 주제적인 힘과 함께 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 흡족한 장면은 무엇인가.
=주인공 둘이 싸울 때? 그때 배우들의 표정이나 편집의 리듬, 카메라의 흔들림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구주월(하정우)이 이희진(공효진)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구주월을 해석하는 하정우의 배우로서의 폭발력이 드러난다. 대사는 동일하게 가고 뉘앙스만 바꿔서 두 가지 버전으로 찍어봤다. 무언가 고전적인 느낌으로 연극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고전문학의 다소 만연체이면서도 우아한 리듬을 구주월의의 대사나 성격으로 종종 드러내고 있다. 구주월의 사랑 고백 장면은 그중 하나로 느껴졌다.
=그 고전문학이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말하는 것일 텐데, 알랭 드 보통의 소설들에서도 이 작품은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다. 일부러 구주월을 독문학과 출신으로 정했고 희진을 처음 만나는 베를린이라는 공간도 그래서 중요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구주월이 <파우스트>를 읽을 때는 이병준씨가 연기하는 상상의 메피스토펠레스도 등장한다. 구주월은 자기의 연애를 클래식화해서 이 시대의 사랑과는 동떨어진 고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게 대부분 연애 못하는 사람들의 습관이다. (웃음) 그게 좀 웃겨 보이겠구나 싶었다. 우아하면서도 조롱의 대상이 되는 그런 클래식함이 중요했다.

-남자주인공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여자주인공의 경우는 어떠했나.
=내가 원래 이 영화로 하고자 했던 건 남자의 연애, 남자의 로맨틱코미디였다. 그래서 여성 상대방에 대한 이 남자의 몰이해가 그 자체로 그의 지랄 맞은 연애의 방법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주인공 캐릭터를 구축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고 필요한 문제였다. 극중에서 구주월은 이희진에 대해 알아가는 걸 목록으로 작성하는데 나도 그런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구체적인 조각들을 모았다. 그러다보니 일관적이지 못한 부분도 좀 있긴 하다. (공)효진씨 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이 캐릭터는 왜 이래요?”라고 효진씨가 물을 때마다 내가 거기에 계속 대답하기 위해 찍어온 영화 같다고. 실은 지금까지도 효진씨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남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이 여자 캐릭터가 굴절되어 보이는 걸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내 의도였다. 사실 “쿨하지 못한 남자의 연애담”은 마케팅쪽에서 붙인 것이고 원래 이 영화의 부제는 “연애에 관한 남자들의 오해와 편견”이었다.

-구주월의 마음을 반영하는 상상적 인물이랄까. 말한 것처럼 배우 이병준씨가 이런저런 모습으로 바꿔가며 코믹하게 등장한다.
=시나리오 초고에는 없던 인물이다. 당시에는 구주월의 내레이션이 훨씬 많았다. 물론 그게 초창기에 투자가 잘 안된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웃음) 이병준씨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구주월의 에고이자 이드이자 슈퍼에고다. 그 둘이 서로 말을 주고받게 하니까 재미있더라. 하지만 그게 진지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영화에서 웃음이 빵 터지는 지점이 있다. 여주인공 희진의 겨드랑이털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누가 봐도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심지어는 이 겨드랑이털 때문에 희진의 출신지가 알래스카로 설정된 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희진은 알래스카에서 오래 살았다. 알래스카에서 여인들은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는다고 영화 속 희진은 구월에게 말한다).
=맞다, 그래서 뒤늦게 알래스카가 생겨났다. 극중에서 구주월이 강력한 이미지 하나만 있어도 작품이 뭔가 풀릴 것 같다고 하지 않나. 희진의 아름다운 외모, 시원시원한 성격 등이 연애 상대자로서 구주월의 관심을 끈 것이겠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희진을 창작의 뮤즈로 놓고 추진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다른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그런 멋진 외모와 스타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달리 보게 만드는 특별한 오브제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게 희진의 겨드랑이털이다.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에 봤던 <색, 계>에 출연한 탕웨이의… 음… 그것도 충격적이었고.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여성들 역시 겨드랑이털을 잘 안 깎았다고 알고 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목욕시켜주실 때 나도 많이 봤다. 물론 그걸 기르는 게 요즘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닐 거다. 하지만 21세기에는 확실히 제한적일 테고 그래서 일정한 동기 부여가 필요해 희진을 알래스카 출신으로 설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한국에서 자란 여자였는데 알래스카로 배경을 바꾸니까 뒤따라 해결되는 것들이 많았다. 자연 친화적이고 신비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고 정복하려 해도 정복당하지 않는 시원의 자연적 이미지가 이 여주인공의 이미지와 겹친 거다.

-그렇게 하여 구주월은 마침내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액모(腋毛)부인>이라는 제목도 기이한 새 소설을 쓰게 된다.
=그 영화 속 소설의 버전은 여러 가지였다. 남해 바닷가에 사는 시골 처녀가 주인공이었던 때도 있었다. 인사동에서 퇴폐 화가로 찍힌 화가가 우연히 겨드랑이털을 가진 순수한 시골 처녀를 만나 상상력을 불태우는 그런 버전. 액모라고 했을 때, 무엇보다 그 어감이 내게는 중요했다. ‘무슨 무슨 부인 시리즈’ 영화들도 떠올랐고.

-구주월이 쓰는 그 소설이 마치 영화 속 영화처럼 일관되게 등장하는데, 들여다보면 이 장르는 필름 누아르나 형사물에 가깝다.
=연애 초기에 이 남자는 이 여자의 비밀을 벗겨보고 싶은 마음에 자기만의 추리를 감행한다고 보았다. 그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을 장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런 장르였다. 그 영화 속 영화 장면들이 영화 속 현실적인 연애와 동등하게 가길 원했다. 그러자면 이 영화 속 영화는 자기 논리를 따로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편집할 때까지도 나를 괴롭힌 문제다. 이 부분이 좀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은 다소 그런 인상을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웃음)
=영화 속 영화 장면은 총 네 부분이 나오는데 원래는 세 부분만 있었다. 하지만 결말을 따로 맺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주월의 후반부 행동을 동기화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일화별 구성을 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좀 평평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기승전결 없이 각각의 일화들이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지는 구조다. 전작 <삼거리 극장>도 그렇고 앞으로 만들게 될 새 영화도 그렇고 기승전결이 다 있다. 하지만 연애 이야기를 그렇게 찍는 건 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일목요연한 드라마로 보여주는 건 피하려고 했다.

-차기작은 미스터리물인가.
=배경은 1972년, 남해의 소매물도라는 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하루에 두번 바닷길이 열리는 인적 드문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통영에서 젊은 형사가 온다. 이 섬에는 성당이 하나 있고 50대 신부가 일하고 있다. 우연히 그 두 사람이 만나 살인사건의 단서를 놓고 머릿속으로 재구성해나가는 이야기다. 제목은 <미로>. 아직 가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