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뻔한 로맨스가 아니라는 안타까움 <서약>
2012-03-14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은 흔해빠졌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어떤가. <서약>은 바로 그 희귀한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이야기의 실제 모델은 뉴 멕시코의 킴과 크리킷 카펜터 부부로, 결혼 2주 뒤에 당한 교통사고로 아내 크리킷은 남편과 결혼생활에 대한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다. 크리킷은 끝까지 기억을 되찾지 못했지만, 다시 남편과 사랑에 빠졌고, 지금도 같이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카펜터 부부의 이야기는 영화에 충실하게 반영되는 편은 아니다. 일단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이들의 경험과 행동은 종교적 성격이 강한데, 밸런타인데이용 로맨스를 만들면서 이들의 종교적 성향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르영화를 만들려면 극적인 요소가 추가돼야 한다.

그 결과 만들어진 영화의 주인공 리오(채닝 테이텀)와 페이지(레이첼 맥애덤스)는 카펜터 부부와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다. 시카고에 사는 이들은 결혼 4년차 부부로 페이지는 재능있는 조각가이며, 리오는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초반에 교통사고로 아내 페이지가 4, 5년간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건 끔찍한 일이지만,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일은 아니다. 리오와 만나기 직전에 심각한 인생의 전환점을 거쳤던 아내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갔고, 리오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의 가족들은 그들을 떼어놓으려 하며, 아내가 찬 적 있는 옛 약혼자는 다시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아내 주변을 맴돈다. 어떻게든 리오는 이 모든 것들을 원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이는 모두 뻔하지만 달달한 로맨스영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기억을 몽땅 잃은 뒤에도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처럼 사랑의 완전성과 운명에 대해 잘 말해주는 소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문제는 영화가 이를 재료로 삼는 대신, 그 무게에 억눌린다는 데에 있다.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리오의 공포와 그로 인한 집착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 영화에서 리오의 고민은 러브 스토리의 재료가 되는 대신 러브 스토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녀를 가족이나 옛 약혼자로부터 지키려는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폭압적이고 일방적이라 편안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기억을 잃은 페이지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찾는 과정은 좋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리오의 관점 위주로 흐르는 통에, 페이지의 이야기는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의 이야기가 연애 이야기로 제대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오의 이야기는 그의 일방적인 망집에 대한 것으로 페이지의 역할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페이지의 자기 발견 이야기는 리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으며 그 비중도 적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로맨스의 존재 이유는 희박하다. 밸런타인데이 시즌용 연애영화라는 원래의 목적에서 심하게 어긋나는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