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차>의 스포일러가 2월24일, 2월26일 일기에 있습니다.
2월24일
어떤 의미에서 소설 <화차>에 없고 영화 <화차>에만 있는 인물은, 선영(김민희)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가 쓴 원작 소설의 쇼코가 변영주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선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감독이 <화차>의 과거와 대과거 시제 시퀀스를 극히 모험적인 방식으로 찍지 않는 한, 영화의 선영은 실종 이후 소설 속 쇼코처럼 서류 기록이나 제3자의 증언으로만 존재할 수가 없다. 쇼코는 ‘풍문’이지만 선영에겐 시나리오가 ‘선영’이라고 쓸 때마다 끌고 나와야 할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독자와 다르게 선영/김민희를 보고 듣고 감각한다. 어떤 방향으로 각색하느냐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이는 <화차>가 영화의 몸을 얻는 순간 점지된 운명이다. 직접인용과 간접인용의 차이를 연상해도 좋다. 선영/김민희는 회상장면에서 객체로서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말을 한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는 내내 쇼코를 커튼 너머에 두었다가 추격자가 마침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쇼코의 등 뒤에서) 이야기를 멈춰, 미스터리 장르에서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장(特長)을 발휘했다. 그렇게 시종일관 유지된 거리감 덕택에 독자는 쇼코를 비련의 히로인으로 손쉽게 치환하는 일 없이 그녀가 매일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숱한 범죄자 중 한명임을 잊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화차>는 무섭다. 진짜 비탄과 위기감은 개인의 유별나게 기구한 운명을 구경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기구함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깝고 보편적인 문제인지를 깨달을 때 엄습한다. 그러므로 대상과의 거리감을 얼마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영화 <화차>는 출발과 동시에 후기 자본주의의 덫을 까발려 보이는 미스터리로서 원작이 지닌 자산의 일부 손실을 감수한 셈이다. 결국 <화차>는 영화로서 피해갈 수 없는 선영/경선의 재현을 아예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을 택했고 각색 결과는 대체로 성공적이다. 변영주 감독도 촬영 기간 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관객이 선영을 동정하게 되면 이 영화는 무너질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완성된 영화는 신파는 아닐지언정 선영의 삶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장면들을 두드러지게 멜로드라마틱한 정조로 연출하고 있다. 상당히 복잡한 플롯을 장착한 이 영화가 끝까지 관객의 소매를 놓지 않는 인력이 거기서 나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월26일
<화차>에 관한 불만의 명세서. 첫째 원작 소설이 서늘하게 묘파하는 소위 신용사회의 함정- “옛날엔 (갖고 싶다고) 꿈만 꿨지만 이제는 일단 소비는 가능해짐으로써 결국 부지런하고 겁 많은 사람들이 카드빚을 짊어지는” 악순환- 이 영화 <화차>에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악랄한 채권추심의 피해로 그려져 두루뭉술해졌다. 둘째, 종근(조성하)이 겪었던 과거의 사적인 곤경이 생략되어 그가 추적 과정에서 선영에게 보이는 과도한 집착의 동기가 모호해졌다. 오랫동안 손발이 묶였던 타고난 형사의 의욕으로만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셋째, 바로 종근의 집착이 도화선 역할을 하는 대단원의 용산역 시퀀스가 부자연스럽다. 긴 추격과 기다림 끝의 일성치고 문호(이선균)가 외치는 대사는 추상적이고, 때마침 흘러나오는 TV뉴스는 타이밍이 지나치게 정확하며, 추격 신은 불필요한 토끼몰이의 인상을 남긴다. 선영의 이미지 역시, 아름답지만 과하게 의미심장하다. 심하게 말하면 해당 시퀀스가 주인공을 추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세팅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3월8일
올해 첫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은 절대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귀여운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쯤이 공평하겠다. 웅장한 화성 풍광, 10대 오타쿠 소년이 신나서 밤새 그려낸 것처럼 요란한 디자인의 메커닉, 선정적인 의상과 원형경기장의 혈투, 원작자에게 보내는 경례- 일부 상영관에서는 4D 효과까지- 가 꾹꾹 눌러 담겨 있는 이 영화는 재미는 과다한데 그중 어느 하나도 헤게모니를 잡지 못해 문제인 유형이다(초반 잦은 점프컷조차 흥분한 감독의 급한 심기를 드러내는 징표로 보여 미소를 부른다). 만드는 사람은 열렬한데 극중 어떤 인물도 간절해 보이지 않고, 원작자 에드거 버로스를 극중으로 끌어들인 액자구조도 텍스트 내적으로 긴요하다기보다는 팬심의 발로로 보인다. 산업 내부자는 아니지만 산업 언저리에 서식하는 영화기자들은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 같은 부류의 영화를 대하면 자기도 몰랐던 오지랖을 발견하곤 한다. “(쭈뼛쭈뼛)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이런 영화를 이런 예산으로 만들어도 되나?” 그러나 내 경우 석연치 않은 감정은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이 감히 A급영화 예산으로 만들어진 B영화(B-Movie: 원래 1930~50년대 동시상영 프로그램의 두 번째 영화를 가리키는 용어지만 70년대 이후 저급한 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로 재평가됐다. 상대적으로 저예산, 지명도 낮은 배우, 장르 관습을 재가공한 스토리가 특징)라는 점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흐르는 “나는 B영화의 팬이고 드디어 내 손으로 만들고 있다”라는 의식을 감지할 때 일어난다. 실체가 불명한 이 어색함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토르: 천둥의 신>을 보는 동안에도 찾아왔다. 한 감독이 B영화를 즐겨보는 문제와 직접 만드는 일 사이에는 미묘한 문턱이 있다. ‘마릴린 먼로 스타일’의 연기를 메릴 스트립처럼 능수능란한 배우도 거의 정확히 해낼 수 있겠지만, 먼로의 연기와는 다를 터다.
3월11일
김경묵 감독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줄탁동시>의 1부를 끌고 가는 탈북자 소년 준(이바울)과 2부의 주인공 게이 소년 현(염현준)은 한 영혼의 다른 판본이다. 준과 현은 극중에서 명시적으로 만나지 않지만 똑같은 자세- 발목을 X자로 교차시켜- 로 앉고, 도통 존대를 모르는 말투도 같다. 어차피 <줄탁동시> 전에도 김경묵 감독의 영화에서 한 사람의 몸이 몇이냐는 문제는 중요한 적이 없었다. 가면과 분장, 경계성 인격장애, 다양한 복제물의 등장은 기본이었다. 첫 장편 <얼굴 없는 것들>에서 섹스 뒤 모텔방에 우두커니 남겨진 게이 소년의 얼굴은 감독의 얼굴로 뒤바뀌고 <청계천의 개들>에서 홀연 여자로 변신하는 청년의 입에서는 남녀의 음성이 동시에 나온다. 청계천 인공폭포에서 카메라가 180도 돌면 주인공이 다른 사람으로 둔갑해 있는 <청계천의 개들>의 마지막 장면은 김경묵 감독이 영화를 통해 도모하는 대안적 세계의 축소판이다.
국적없는 준과 주소 없는 현은 본질적으로 같은 모순을 정반대 양상으로 체험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세계를 이루는 이원성 원리를 표상하는 상징적 쌍둥이다. 상징으로서 쌍둥이는 종종 한쪽이 다른 쪽을 살해하며 서로를 거울로 이용해 자아를 규정한다. <줄탁동시>의 제목은 알 안팎에서 병아리와 어미닭이 껍질을 쪼아 세상에 나오는 일을 가리키지만 이 영화에서 어미닭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안’에 갇힌 현과 ‘바깥’에 갇힌 준이 있을 뿐이다. 현의 집은 쓸데없이 넓은 반면 준의 거처는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다. 고급 아파트에 갇힌 소년은 유리벽 밖을 동경하며 춤을 추지만 기껏 외출하는 장소는 공중화장실, 노래방, 모텔의 밀실이 전부고, 내몰린 소년은 깃들 장소를 구하지만 기계 세차하는 자동차 운전석에서 취하는 몇분의 휴식이 고작이다. 준이 친구 순희의 초라한 방에서 누린 작은 평화는 도래하자마자 박살난다. 프레임을 탈출하고자 연신 퍼덕이는 소년과, 프레임 인(frame-in)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번번이 외부로 떨어져나가는 소년을 2시간 동안 바라보노라면 급기야 스크린이 그들을 가둔 알의 껍질로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