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영화의 끝은 항상 비슷했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죽거나, 모두 죽거나, 살아남은 한 사람이 석양을 등지고 걸어간다. 그 뒤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TV시리즈 <워킹데드>의 원작 코믹스 작가인 로버트 커크먼은 좀비의 출현 뒤 폐허가 된 미국에서 펼쳐지는 묵시록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워킹데드>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새벽의 저주> <좀비랜드> 등 할리우드에서 만든 좀비영화들이 엔딩크레딧으로 대신해온, 생존자들의 처절한 후기에 집중한다. 한차례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
<워킹데드>의 생존자들이 놓인 극한 상황은 시즌1의 첫 장면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차에 넣을 기름을 찾으려고 도로에 정지한 빈 차들을 뒤지던 보안관 복장을 한 남자의 눈에 곰인형을 안고 걷는 소녀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한데 뒤를 돌아본 소녀는 얼굴의 반이 썩은 좀비다. 남자는 한때는 사랑스러운 소녀였을 좀비의 이마에 가차없이 총알을 명중시키고 계속해서 기름을 찾는다. 혈혈단신으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이 남자는 <워킹데드>의 주인공인 릭 그라임스(앤드루 링컨)다. 본래 보안관이었던 릭은 작전 중에 총상을 입고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폐허가 된 세상에서 눈을 뜬 운없는 사람이다. 그가 깨어난 도시는 좀비에 점령당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릭에게 적대적이다. <워킹데드>에서 그는 인간의 마지막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확실한 단서도 없으면서 어딘가에 아내와 아들이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길을 떠나고, 무질서 속에서도 보안관복을 벗지 않는다. 그는 몇번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처럼 가족과 재회한다. 생존자들과 무리를 이루고, 정착할 만한 농장을 찾고, 아내의 몸에 찾아온 새 생명에게서 세상의 희망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워킹데드>는 우리가 이런 작은 희망들을 찾아낼 틈을 주지 않고, 생존과 다른 가치를 대립시켜 양자택일을 종용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결말을 안다고 한들 지켜보는 우리의 심정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훌륭한 장르영화들이 그러하듯, 장르라는 장식을 걷어낸 <워킹데드>의 면면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아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 거다. 시즌1의 에피소드 6편 모두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프랭크 다라본트는 말한다. “<워킹데드>에서 좀비라는 설정은 케이크의 당의와 같다. 이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짧은 시간에 변화하는 캐릭터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극심한 스트레스 아래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리얼리티TV쇼나 경쟁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워킹데드>의 생존자 캠프에도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있다. 한톨 보탬이 안되는 선인이 있는가 하면, 뼛속까지 악인이지만 동정이 가는 캐릭터도 있다. 그중 변화의 폭이 가장 큰 캐릭터가 릭이다. 그는 뒤늦게 생존자 캠프에 합류하지만 팀의 리더가 된다.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고뇌하는 괴물로 변화하는 릭은 영국 배우 앤드루 링컨이 연기한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키라 나이틀리에게 스케치북으로 사랑을 고백해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한 주인공인 그는, 원작자인 커크먼이 “<러브 액츄얼리>의 그 남자?”라며 오디션 전에 농을 던졌을 정도로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서 나는 젠틀한 남자로 굳어졌다. 나조차도 나를 지겨워하던 차에 <워킹데드>는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제 화면 속 그를 보면, 장총을 어깨에 두르고 남부 사투리를 툭툭 내뱉을 것만 같다. 현관 앞에서 불쌍한 미소를 짓는 남자보다 황무지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괴물이 100배쯤 더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