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당신에게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2012-03-29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로맨스 조>,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묻다

이광국의 데뷔작 <로맨스 조>는 물론 이야기 구조가 돋보이는 영화다. 이미 여러 평자들이 하나의 전체 그림으로 조합되지 않는, ‘뫼비우스 띠’(“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쏟아내다”, <씨네21> 844호) 같은 형식을 이 영화의 신선한 미덕으로 꼽았다. 현실과 허구, 회상과 상상을 단순히 오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아예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파편들을 끝없이 펼쳐놓으면서도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이 영화의 저력은 흥미롭고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 <로맨스 조>의 독특한 구조에 대해 말할 때, 이야기들을 어떤 식으로든 겹치고 흩어지게 하는 형식의 표층, 그러니까 기술보다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화두는 실은 그 형식을 추동하는 이 영화의 무의식, 즉 <로맨스 조>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묻는 일인 것 같다. 자살에 실패하고 술에 취한 로맨스 조(김영필)는 말했다. “왜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이야기, 아니면 죽음. 어느 무명감독의 한낱 과장된 자괴감이 우습게 표출된 말일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그 절규는 내내 영화에 울려퍼지며 어쩌면 너무 근본적이라서 대책없는 하나의 궁금증으로 우리를 이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야기란 무엇이기에? 나는 <로맨스 조>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기묘한 생태계가 결국 이 세계를 사는 남녀의 생태계를 통과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어떤 영화들의 계보 안에 두지만, 동시에 그 계보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며, ‘이야기, 여자, 남자’라는 세 화두의 연결고리가 영화의 현란한 형식보다 주목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의 조감독이었던 이광국의 이력과 이야기 구조의 독특함을 들어 <로맨스 조>와 홍상수 영화와의 구조적 연관성에 대해 말하는 견해들이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적 차원에서의 친연성은 생각보다 적다.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든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문을 찾고, 그 이야기를 끝없이 지속시키는 이광국의 방식과 우연의 반복에서 차이를 보고 거기서 이야기의 물질성을 얻으며 삶의 구체성을 보는 홍상수의 방식은, 그 구조도, 그리하여 얻는 영화적 활력도 다르다. 그러므로 만약 <로맨스 조>에서 홍상수의 어떤 영화들이 연상된다면, 그건 형식이 아닌, 남자 캐릭터가 공유하는 어떤 지점들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로맨스 조의 내레이션이 풍기는 어조, 대사의 결, 자기 비하와 자기 다짐, 스스로는 더없이 진지하지만, 실은 더없이 희극적인 제스처들 등에서 홍상수 영화의 남자 인물들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은데, 이런 표피적인 유사함은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이광국의 무의식적인 영향이 아니라, 다소 의도적인 모방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영화 속 로맨스 조라는 남자는 자기의 무력한 현실에서 허구의 인물들을 참조하며 그들을 흉내내는 방식으로 자기 현실을 사는 캐릭터라는 인상을 영화는 종종 주고 있다.

이야기로 버티는 이광국의 남자들

남자 인물들의 면면에 관해서라면, 여기서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또 다른 감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지적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윤성호다. 영화에서 이야기의 겹 가장 바깥 즈음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명 ‘300만 감독’(조한철)은 그로 분한 배우가 <은하해방전선>에 출연해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말로는 혁명이라도 할 것처럼 굴지만, 실상은 더없이 소심하기 짝이 없는 윤성호 영화 속 남자 캐릭터들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은하해방전선>에서 말로 연애하고 말로 영화를 만드는, 인용과 모방에서 창작이 시작된다고 믿는 영재는 <로맨스 조>에서 감독이라는 직분으로 다방 여종업원을 유혹하려다가, 도리어 그녀의 ‘말’에 유혹되어 타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마치 자기의 이야기인 양, “한 남자의 실존, 첫사랑… 여기에는 어떤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어”라고 허세를 부리는 300만 감독과 거의 같은 계열에 속한 남자 캐릭터처럼 보인다.

무리를 무릅쓰고 <로맨스 조>의 남자들을 말하면서 홍상수와 윤성호를 끌어온 건, 이들 영화 속 남자들이 기존의 한국 장르영화들 속 남자 캐릭터들의 전형과는 상이한 디테일들로 생동하기 위해 애쓰는 유형들이라는 느슨한 공통점(더없이 유약하지만 들끓는 욕망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애걸복걸하는 남자들)을 갖고 있고, 그런 유사함 속에서도 홍상수의 세계와 윤성호의 그것이 전혀 다르듯, 이광국 역시 여기에 또 다른 유형을 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의 차이는 유약한 남자들이 세계를 버티는 서로 다른 방식에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윤성호의 인물들은 자신의 언어를 표현할 목소리를 잃자 피리를 불거나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다른 수단을 고안하면서 ‘말’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혹은 자신을 영재 7호, 8호, 9호라는 식으로 분열시키거나 전환하며 자기 안의 중층적인 욕망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한다. 끊임없는 자기 해체의 놀이 같지만 그 놀이는 사실, ‘나’를 놓아버리지 않기 위한 행위다. 한편 홍상수의 남자들은 여행을 하고 그 길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거기서 생을 감각하고 “생각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도 결국 폐쇄된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끝내 살아남은 존재가 여전히 ‘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 존재는 여전히 떠돌며 반복되는 시간을 견딘다.

좀 먼 길을 돌아왔으나, 이제 이들의 남자 인물군에 더해 제3의 유형이라고 불러도 될 이광국의 남자들에 대해, 궁극에는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되었다. 한마디로, <로맨스 조>의 남자들은 세계를 이야기로 버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들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 이야기가 내가 만든 것인지,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지, 혹은 회상인지의 문제는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오직 이야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 같다. 말하자면, 이 남자들은 이야기에 집착하지만 그 집착을 단순히 이야기에 대한 소유의 욕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나’라는 주체성의 문제와도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명확하지 않은, 그저 닫히기를 두려워하는 이야기는 덧붙여질수록 그들의 정체를 흐릿하게 만든다.

또 하나 정말 의아한 건, 영화 속 남자들에게 이야기는 사랑, 연애, 섹스와도 교집합을 이루지 않는 다른 무엇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좀 상투적으로 말해, 그들은 이야기로 여자를 꾀려고 들지도 않는다. 아니, 그들에게는 여자를 꾀는 것보다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로 세계를 버틴다는 건 어떤 의미이기에 대체 연애보다도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 물음 앞에서 <로맨스 조>의 여자 인물들은 비로소 흥미로워진다. 우리는 어린 초희(이채은)와 다방 여종업원(신동미)이 처한 유사한 상황들 때문에 이들을 동일 인물의 과거와 현재로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끝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내내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하던 어린 초희와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풀어놓고 전달하던 다방 여종업원에게 과연 이야기란 무엇일지 질문하고 싶어진다. 고향을 떠나 순정적인 시절과 이별하고 홀로 아이를 낳고 떠돌다 남자들을 상대하게 된 이 생존력 강한 여자들에게 이야기는 여관을 찾은 감독들의 그것과 같은 것일까. 300만 감독에게 멋진 이야기 꾸러미들을 풀어놓고 다방으로 돌아온 여인은 말했다. “이제 몸으로 돈을 버는 시대는 끝났어. 사람들마다 꼭 필요한 이야기가 있거든.” 남자 감독들에게는 영감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미지의 매혹적인 세계가 이 여인에게는 생계수단이다. 그녀는 이야기로 세일즈한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섹스보다 지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인물들 중 유일하게도 누군가의 회상 속에, 혹은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초희의 경우는 어떤가. 그녀와 어린 로맨스 조(이다윗)가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나는 <로맨스 조>의 형식을 스타일의 과시라는 위험에서 구해주며, 종종 다른 영화들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와중에도 오직 자기만의 감정으로 지켜지는 장면들이 바로 초희와 어린 로맨스 조의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이 둘의 이야기가 “익숙한 방식의 멜로 라인”처럼 상투적으로 보일까봐 우려를 표했지만, 내용의 상투성 측면에서라면 성인 남자 감독들의 행태를 묘사하는 방식이 더 상투적이며, 오히려 이 단순하고 (감독의 말을 따르면) “원형적”인 멜로에는 <로맨스 조>가 형식의 다층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핵,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씁쓸한 자문, 그러나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어떤 감정들을 매만지며 섞여 있다.

환각의 동굴을 찾는 남자 앨리스

초희와 그녀를 짝사랑하던 소년 로맨스 조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날 밤, 둘은 서울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여관에서 잠을 잔다. 그러나 소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초희에게 근처 가게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가방도 챙기지 않고 여관을 나선다. 초희는 소년을 붙잡지 않는다. 골목을 뛰쳐나와 홀로 울먹이던 소년은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엇이 소년을 두렵게 만든 것일까. 돌아오지 않는 소년을 기다리는 대신, 초희는 그날 새벽 여관의 옥상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본다. 소녀는 이제 혼자 이 낯선 도시의 황량한 현실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지나 다시 초희와 어린 로맨스 조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소녀의 얼굴을 한 초희는, 그러나 진한 화장을 하고 허름한 여관방에서 어른 남자와 함께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초희는 도시의 타락한 어른의 세계, 그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피로한 심신으로 버티고 있다. 아침이 되어 남산타워를 뒤로한 어느 골목을 내려오던 초희는 술에 취한 채 계단에 널브러져 주정하는 한 소년을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는 분명 로맨스 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감독이 된 소년 로맨스 조가 바로 그 계단 아래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 모자를 눌러쓰고 그 장소를 다시 찾은 초희는 우연히 엑스트라로 섭외된다. 표지에 ‘로맨스 조’라고 써 있는 시나리오를 받아든 초희는 자신과 어린 로맨스 조의 일화가 이야기로 만들어진 걸 알게 된다. 저 멀리서 의젓하게 연기연출을 하고 있는 로맨스 조에게 그녀가 은밀히 시선을 던진다. 그런데 그때 로맨스 조의 무심한 외침, “저기요, 여기 쳐다보시면 안돼요.” 아마도 여기에 감춰진 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끝내 현실에 상처입지 않은 ‘이야기’여야 해요.” 어찌하여 소년은 그 애틋한 첫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허구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으나, 현실에서는 잊혀진 첫사랑. 이야기의 빛나는 환영성을 지켜내려는 소년 감독과 그 환영에서 밀려나서 지금 그 환영에 얼룩처럼 달라붙어 있는, 한때는 주인공이었으나 이제는 남루한 현실의 소녀. 그날 밤, 초희는 다시 남산타워가 보이는 그 골목길을 홀로 걸어가고 영화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장면들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남산타워와 소년과 소녀의 되돌릴 수 없는 관계, 혹은 그들 사이를 가르는 ‘이야기’라는 저 투명하지만 거대한 장벽, 저 가파른 계단의 거리는 서글프다. 초희는 더이상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로맨스 조”라는 허구에서만 기억되는 자신을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이야기의 환영성은 그녀의 삶의 조건을 투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로맨스 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앙상한 첫사랑으로부터, 삭막한 서울의 밤거리로부터, 죄의식으로부터 과거의 부서지지 않은 순정, 깨끗한 마음, 그러니까 이야기-소망으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이야기의 환영성만이 그의 비겁함과 상처를 망각하게 해줄 것이다.

영화 속 다방 여종업원과 어린 초희, 그리고 어른 로맨스 조의 손목에 그어진 죽음충동의 선, 죽음에 실패한 그 표식도 결국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 안에서 읽힌다. 여자들에게 그것은 다시는 이야기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징표이자 시간을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이제는 모두 아물고 닫혀버린 시간의 흔적이다. 하지만 이제 막 여관에서 손목을 그은 어른 로맨스 조에게 그것은 이야기 속에 머무르려는, 현실의 시간으로 깨어나오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자 두려움의 표식이다. 그것은 아직도 여전히 아물기를 거부하며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로맨스 조>는 이야기라는 환영을 현실로 착각하려고 애써야 버틸 수 있는 어떤 남자들의 유약한 절실함과 그것을 환영으로 인정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여자들의 강인한 쓸쓸함으로 의외의 감정적 조응을 이뤄낸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른 로맨스 조에게 “어디서 튀어나오신 분이세요? 현실을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돼요. 어서 돌아가세요”라는 말이 던져져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야기가 닫히는 순간을 필사적으로 미루는 남자들이 이야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을 따름인데, 그것은 스스로 이야기로 도망가는 것뿐이다. 달리 말해, 자신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다. 경찰관의 마지막 말을 듣고 로맨스 조가 짓던 그 마지막 표정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 나’를 대면한 자의 당황스러움이다. 그러나 이윽고 안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분열하고 쇠락하는 ‘나’가 아니라, 그런 나의 연속성을 지워주는 허구의 문을 열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는 나’를 보존하려는 남자들이 여기 있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사실, 이야기의 멋진 설계가 아니라 그 복잡한 구조를 추동해서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나’를 흩어놓고 숨겨서 결국엔 ‘나’가 사라진, 이야기 자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닐까. 오직 이야기를 통해서만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숨쉬며 살 수 있는 겁 많은 남자 앨리스들. 그들은 오늘도 여인이 아니라 토끼를 따라 환각의 동굴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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