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다큐페스티발2012 집행위원장인 오정훈 감독은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푸른영상의 일원으로 <세발 까마귀>(1997), <낙선>(2000) 등을 연출했던 그는 <호주제폐지, 평등가족으로 가는 길>(2001)을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났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떠맡기 위해서였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 머물면서 그는 예비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3년을 작정했지만 그 시간은 5년으로, 다시 8년으로 늘어났다. 도중 몇번이고 카메라를 잡으려고 맘먹긴 했다. 하지만 스스로 벌인 일이 덫이 되어 그의 결심을 붙잡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2012에서 상영되는 <새로운 학교-학생인권 이등변삼각형의 빗변 길이는?>은 오정훈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오래 쉬었어도, 그의 카메라는 녹슬지 않았다.
-10년 만이다.
=동료들이 나보고 다큐 복돌이라고 부른다. 복학생을 뜻하는 복돌이. (웃음) 그동안 남의 작품에 대해 논평만 하다가 직접 만들려고 하니 쉽지가 않더라.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10년 가까이 활동했다.
=정확히 8년이다. 푸른영상에서 8년, 미디액트에서 8년. 미디액트는 처음에 3년만 하자고 들어갔는데 나오려고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미디액트가 구심점이 되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던 미디어교육이 이주민, 장애인, 노인 등으로 확산된 건 뿌듯하다. 2009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영상미디어센터 공모 파행을 둘러싼 싸움이 없었다면 좀더 일찍 카메라를 들었을 것이다.
-4대강, 용산, 한진중공업 등 굵직한 이슈들을 택하지 않고 학생인권조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학생인권조례가 갖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봤다. 학교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감옥보다 학교가 훨씬 더 보수적이다. 감옥이야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여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동안 많이 바뀌지 않았나. 다들 알다시피 2010년 10월5일에 경기도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됐다. 학생들이 학교를 바꿀 수 있을까, 선생님들은 전과 달리 학생인권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그런 궁금증으로 교실 문을 두드렸다.
-촬영 요청을 받아들인 학교가 많지 않았을 텐데.
=교문을 열어준 학교가 없었다. 학생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는데, 딱 그랬다. 그러다 한 세미나에서 경기도 용인의 흥덕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우리 학교 괜찮다’면서 “촬영 한번 해보실래요?”라고 먼저 제안하셨다. 2010년에 만들어진 흥덕고는 교육과정이나 학교운영이 비교적 자유로운 혁신학교다. 공모를 통해 뽑힌 초대 교장선생님은 학교에 오자마자 맨 먼저 체벌금지를 선언했을 정도로 교사와 학생의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하셨던 분이다.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학교여서 곧바로 교장선생님을 만났고, 1주일 뒤 교사회의를 통해서 촬영할 수 있게 됐다. 반도 지정받고.
-특정 반을 배정받았다고?
=1학년 8반 학생들이 가장 얌전하고, 집중도 잘한다고 하더라. (웃음) 다른 반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끼리끼리 어울리는데, 1학년 8반 아이들은 서로 굉장히 친했다. 자기소개할 때 한 친구가 나오자 아이들이 반에서 그 친구 목소리가 가장 작다면서 나한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학생들에게도 촬영 동의를 구했나.
=일단 아침 조회 때 가서 기본적인 피칭을 했다. 상영 전에 보여주고 싫은 장면은 빼겠다고 했고, 실제로 방학 때 완성본을 보여주고 나서 승인을 받았다.
-학생들이 카메라를 별로 의식하지 않더라. 첫 촬영 때부터 그랬나.
=요즘 친구들의 성향이 그런 것 같다. 외부에서 누가 와도 반갑게 맞아준다. 학생들에게 유령이나 그림자처럼 촬영할 테니 수업 시간에는 말 걸지 말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제외하곤 편하게 지냈다.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들과 친해졌을 텐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보기와 다른 면모들을 알게 됐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영재는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고, 누가 보면 영락없는 날라리라고 여길 옥희는 속이 굉장히 깊은 친구였다. 곱슬머리 준석이는 공부와 담 쌓은 듯 보이지만 이미 대학 갈 준비를 마친 친구다. 준석이는 유독 사회 시간에 반짝거렸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 꿈이 펀드매니저였다. 두꺼운 관련 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수업 시간 외에 공부한다. 대화를 나눈 뒤에 다시 촬영 분량을 보니 처음에는 몰랐던 아이들의 모습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더라.
-학생이 수업 시간에 책 덮고 자도 선생님이 꾸중하지 않는다. 나이 든 관객은 학생들의 불량한(?) 수업태도를 보고 혀를 찰 텐데.
=너무 분방한 것 아니냐고? (웃음) 교과서도 없고, 필기도 안 하고, 학생들이 축 늘어져 있으니까 그렇게 보시는 분도 있을 거다. 하지만 과학 시간 장면을 보면 학기 초와 학기 말에 학생들의 집중도가 완전히 다르다. 기존의 권위와 폭력에 기대서는 학생들이 지닌 자발성을 발견할 수 없다. 유치원에 다닐 때만 해도 ‘저요, 저요’ 했던 아이들이 왜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말을 안 하는지 아나. 할 말을 못하게 해서다. 학교에선 해야 할 말만 하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입을 닫는 거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선생님 대신 네이버를 찾는 것이고.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왜 무기력해지는가를 따져 묻고 싶었다. 누군가는 인권에 관한 영화 맞냐고 묻기도 하는데, 인권영화 맞다. 인권의 시작은 자존감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 아이들은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진 것일까.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학교에 왜 가는 것일까, 라고 자문한다. 결국 도마에 오르는 건 철학 없는 한국의 교육 정책이다.
=교사들에게도 학교는 너무 힘든 공간이다. 그렇다고 체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성립되는 게 아니다. 반년 동안 학교를 들여다보면서 교사들의 헌신을 눈으로 확인했다. 동시에 과연 누가 교사들의 열정을 짓밟고 있는지 따져보게 됐다. 부정적인 학교 현실에 대한 책임을 모두 교사들에게 떠맡기고, 심지어 학생인권을 보장하면 학교폭력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세력들이 분명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사들이 이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등이 아닌 개별 학교의 교사회 등을 통해서 학교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후속편을 찍을 계획도 있나.
=1학년 아이들이 내년에 고3이 된다. 아이들이 그때 어떤 선택을 할지, 또 지금의 학교가 얼마만큼 혁신을 이뤘을지도 궁금하다.
-2년째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 때문에 <새로운 학교>는 경쟁부문인 국내신작전이 아니라 초청부문인 올해의 초점에서 상영된다.
=(웃음) 첫해는 그러려니 했는데 올해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
-2001년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프로그래머, 집행위원 등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이 그 시점에 필요했던 이유는 뭔가.
=심의 문제가 컸다. 1990년대 중반에 Q채널 다큐멘터리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독립다큐멘터리가 상영됐지만 이들 영화제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충분하게 누릴 수 없었다. 인디포럼 역시 독립다큐멘터리를 많이 상영했으나 심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처럼 영화제가 심의 면제를 요청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내가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심의 때문에 <세발 까마귀>의 출품을 철회한 적도 있다. (웃음) 그런 불만들과 아쉬움들이 자연스럽게 인디다큐페스티발로 이어진 거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의 단체사업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빚을 지게 됐다.
=여기저기 지원요청을 다니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독립영화제인데 재정도 독립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공적기관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제가 개별 감독들과 관계자들의 축제인가. 관객과 함께하는 자리다. 실은 공적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객의 영화 향유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래서 매번 그런 힐난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지원도 안 하면 뭘 할 거냐고. 공적지원의 비율은 줄여야겠지만 그렇다고 정부나 지자체가 나 몰라라 해선 안된다. 영진위도 인디포럼이나 인디다큐페스티발처럼 10년 이상 관객과 감독들의 참여가 지속된 영화제는 공모사업이 아닌 지정사업 방식으로 지원하는 게 맞다.
-올해는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출품됐고, 상영된다.
=2000년대 들어 사회보다는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가 많아졌고, 실제로 다양한 스타일과 형식을 지닌 1인칭 시점의 작품이 많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일정한 각성의 계기들이 주어졌다. MB정부 들어서는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발언 기능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고. 인디다큐페스티발 역시 한때 느슨해졌는데, 2009년부터 실험, 진보, 대화라는 영화제 모토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됐다. 올해는 용산 특별전을 준비했는데, 사회적 이슈를 공유하면서 감독들이 서로 자극을 받는 자리가 될 듯하다. 4대강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80년대 말처럼 감독들과 지역 활동가들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지는데, 이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다.
-반면, 다큐멘터리가 관객과 만나는 방식은 여전히 정체 상태 아닌가.
=극장배급, 공동체 상영 등을 진행하고, 여러 가지 관련 정책들을 만들어냈던 인디스페이스가 문을 닫으면서 답보가 계속되고 있다. 극장 개봉을 당연시하면서 다양한 플랫폼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지난해에 개봉한 18편의 다큐멘터리 중 독립다큐멘터리는 7편 정도인데 이중 관객 수 4천명을 넘은 작품이 별로 없다. 지역 공동체 상영회에 가보면 예전처럼 조직이나 단체 등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그만 소모임 중심이다. 관객이 고정된 층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면 유동적인 관객의 흐름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다.
-차기작은 구상 중인가.
=이미 찍고 있다. 이주민들이 ‘몽땅’이라는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노래단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단이 첫 번째 프로모션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3달 정도 촬영했는데, 좀더 찍어야 한다. 프로듀서가 아까 전화해서 내일 가편집 시사해야 하는데 마무리 안 하고 어디 갔느냐고 몇번이고 추궁하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