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무대 위에 내려앉는 쓸쓸함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드물지 않다.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게 마련이며 대개 환한 조명 아래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보다는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더 매력적인 법이다. 무대 위의 악마에게 매료되어 한번 무대 위 각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초라하게 내팽개쳐져도 쉬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설령 그 빛이 환상일지라도 달콤한 본능은 계속해서 날갯짓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화려함에 중독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가 말했던 것처럼 “신비로운 진리는 어둠 속에 깃들어 있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인생 그 자체가 무대인데 어디로 퇴장한단 말인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무대는 계속된다. <온 투어> 역시 버려지고 밀려난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공연제작자 조아킴(마티외 아말릭)은 미국에서 데려온 뉴 벌레스크 단원들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순회공연 중이다. 한때 잘나가던 TV프로듀서였던 그는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많았던 트러블 탓에 업계에서 밀려나 미국으로 떠났지만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프랑스로 돌아왔다. 르 아브르, 로셰포트 등 프랑스의 작은 항구도시를 떠돌며 화려하고 섹시한 스트립쇼로 관객의 주목을 받지만 긴 여정은 그를 초조하게 만든다. 정작 꿈의 무대 파리에서의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무대를 찾기 위해 홀로 파리를 찾아간 조아킴은 그곳에서 자신의 불편한 과거와 수차례 마주하게 되고 그와 그녀들이 함께 꿈꾼 무대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간다.
성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콩트를 여성의 매력을 강조한 춤으로 표현했던 오리지널 벌레스크는 19세기 초반 미국으로 건너가 저속한 희극과 코러스걸의 쇼를 결합한 형태로 정착되었다가 최근 스트립쇼에 블랙유머를 녹인 뉴 벌레스크로 부활했다.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온 투어>에서는 현재도 유럽 전역에서 쇼를 공연 중인 진짜 뉴 벌레스크 댄서들이 직접 출연하여 영화 속 공연 일정에 따라 항구마을을 떠돌며 순회공연을 펼쳤다. 이 작품에서 감독, 배우, 각본까지 도맡은 프랑스의 시네아스트 마티외 아말릭은 화려한 조명 아래 거침없이 관객을 장악하는 그녀들의 진짜 공연 모습과 몰락한 공연제작자 조아킴의 드라마를 절묘하게 결합해 ‘무대와 인생’이라는 진실에 도달하고자 한다. <잠수종과 나비>의 배우로도 유명한 그는 감독과 배우, 드라마와 다큐, 무대와 현실이란 양쪽의 경계에서 두 세계를 조율한다. 얼핏 이야기를 들으면 벌레스크 무대의 화려함 대신 무대 뒤의 각박하고 지친 삶의 단편을 부각할 것 같지만 사실 영화는 어둠을 그리 오래 응시하지 않는다. 외려 인상적인 것은 무대 밖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는 그녀들의 순수한 미소다. 영화 속 벌레스크 공연이 전혀 선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그녀들의 몸짓에 생을 위한 약동과 환희,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육감적’, 아니 ‘육체의 증명’인 그녀들의 무대는 이미 삶을 향한 뜨거운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전체적으로 생략과 절제 위에 있는 마티외 아말릭의 연출은 각 인물들의 사정에 주목하기보다 그들이 보여주는 표정과 물성(物性)의 흔적을 포착하려 애쓴다.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비어 있다. 특히 조아킴의 미소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종종 헷갈리게 만든다. 인물들의 사연도 설명하는 대신 툭툭 던져진 반응과 ‘지금’의 상황만을 보여준다. 공연에 관한 영화임에도 공연 순간을 제외하곤 음악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화면도, 인물도, 사건도 평평하게 스크린 위에 발라져 있는 이 영화의 끝에 이르면 그들 혹은 그녀들의 흔적들이 의미없는 경계를 무너뜨리며 우리를 위로한다. 무대 밖 안정된 삶을 동경하는 것도 그들이고 무대를 즐기고 탐닉하는 것 또한 그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 ‘연극이 끝나고 난 뒤’는 사실 없다. 조아킴의 마지막 대사처럼 무대는 그리고 삶은 늘 그래왔듯 계속될 뿐. “자, 이제 쇼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