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새벽의 연기는 뚜렷하다. 그런데 송새벽의 얼굴은 “밋밋하다”. 스크린에서만큼은 우리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아두지만 길거리에서 그를 스쳐지나간다면? 열에 여덟은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평범한 얼굴의 놀라운 힘이란 이런 것이다.
지구 멸망을 주제로 한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송새벽은 임필성 감독이 연출한 <해피버스데이>에 출연한다. <해피버스데이>는 아빠의 8번 당구공을 망가뜨린 민서(진지희)가 정체불명의 사이트에 접속해 당구공을 주문하고, 2년 뒤 당구공 모양의 괴혜성이 지구로 돌진한다는 내용의 단편영화다. 송새벽은 카이스트까지 졸업한 수재지만 딱히 생산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 민서의 삼촌으로 등장한다. <마더> <방자전> <시라노; 연애조작단> <해결사> <위험한 상견례> 등에서 보여준 송새벽식 적재적소의 연기는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수십 가지의 얼굴을 그려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평범한 얼굴로 수백 가지의 매력을 뽑아내는 송새벽을 만났다.
-지난해 초에 12회차로 <해피버스데이> 촬영을 마쳤다. 짧은 기간 집중해서 찍는 단편영화 작업 재밌던가.
=아쉽다. 기간이 너무 짧으니까. 사람들과 친해질 만하면 끝나버리잖나. 대신에 짧고 굵게 끝낸 느낌? 옴니버스영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그런 시원한 맛이 있는 거 같다.
-<해피버스데이>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시사회나 쫑파티 자리에서 오다가다 인사드리면서 임필성 감독님을 알게 됐다. 시나리오를 주셔서 읽었고 ‘이야~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했다. 예전에 <지구를 지켜라!>를 굉장히 재밌게 봤거든. 그런 유의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다 싶어서 ‘시켜주시면 한번 잘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된 거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재밌던가.
=예전부터 지구 종말론 얘기는 많았잖나. <2012> 같은 영화도 있었고. <해피버스데이>에는 기존의 종말론 얘기와는 다른 코드의 이야기가 있다. 이를테면 진지희양이 아버지의 8번 당구공을 정체 모를 우주의 어딘가에 주문하는 이야기들, 재밌지 않나. 진짜로 저럴 수도 있겠다 싶은 거. 왜 초등학생 때만 해도 영상으로 통화하는 그런 날이 올까 했는데 요새는 다 스마트폰으로 통화하고. 그런 기발한 상상력이 재밌었다.
-로봇 오타쿠 삼촌으로 등장한다. 장발의 레게머리도 파격적이었다.
=일단 머리가 무거웠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내가 아닌 거 같고. 가만히 보니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설정은 감독님과 미술감독님이 하셨을 거다. 나는 그냥 하라는 대로 했다. 쓰라면 쓰겠어요, 입으라면 입겠어요, 벗으라면 벗겠어요. (웃음)
-지금까지는 외적으로 변화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항상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출연하다가 변신하니까 송새벽인 줄 모르겠더라.
=그게 나름 꾸민 건데. (웃음) 티가 안 나서 그럴 수도 있는데, 아무튼 못 알아볼 정도인가? 선글라스 껴서 더 그럴 수도 있겠다. 눈이 안 보여서.
-사진 촬영할 때도 의상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미지가 확 바뀌더라.
=밋밋하지, 얼굴이. 잘생긴 배우들도 많고 개성있게 생긴 배우들도 많고. 그에 비하면 내가 밋밋한 얼굴이란 거 알고 있다. 근데 그렇다고 못생기진 않은 거 같고 그냥 평범한 얼굴인 거 같다. 외모에 크게 콤플렉스는 없다.
-<인류멸망보고서> 제작보고회 때 본인에게도 오타쿠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면이 그렇다는 건가.
=아무래도 송새벽이 연기했으니까 그런 모습이 없는 건 아닐 거다. 그런데 그때 그 얘기를 한 건 내 성격이 집요해서 그런 건 아니다. 뭐 하나에 꽂히면 막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은 아니다. 난 물컹한 스타일이다. 좋게 얘기하면 말랑말랑? 그러려고 노력을 한다. 어머님도 항상 ‘물 흐르듯 살아라’라고 습관처럼 얘기하신다. 나도 그게 편하고. 영화에서 형수님한테 얹혀살면서 날마다 구박받는, 뭐만 하면 트집 잡혀서 구박받는 부분은 좀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누구한테 구박받나.
=이쪽저쪽. 고향에 계신 부모님한테도 구박받고. 구박받는 게 나쁘지 않은 거 같다. 애정 표시니까.
첫 무대를 추억하다…
-군산에서 쭉 나고 자랐나.
=탯줄 고향은 완도다. 완도에서 태어났다가 100일 이후에 군산으로 이사갔다. 거의 군산 토박이다.
-군대 제대하고 스물네살에 서울에 왔다. 처음엔 오디션 낙방 경험도 많이 했겠다.
=아이고, 그렇지 다들. 제대하고 갓 올라와서 뭐가 있겠나. 스무살 때부터 군산에서 극단 생활하면서 연극을 했지만 2년2개월 군생활 하면서 다 까먹고 새로 시작하는 거였다. 걸레질하면서 포스터 붙이고. 다 똑같다 그건.
-연우무대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오디션 봤다. 오디션이 3차까지 있었다. 무슨 대기업 입사시험처럼. 1차 땐 한명씩 무대에 올가가서 독백 연기를 했다. 3차 시험 때는 2차 시험 붙은 사람들끼리 워크숍을 해서 짧은 공연을 만들었고 그걸 연우 선배님들을 객석에 모시고 공연했다. 긴장감이 장난 아니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객석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합격 소식 듣고는 눈물나게 기뻤겠다.
=극단에서 연락주겠다고 해서 집에 갔는데 연락이 없는 거다. 떨어졌나보다 싶었다. 오디션 볼 당시 들려온 소문이 여배우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남자배우는 안 뽑나보다 싶었는데 밤 10시 넘어서 전화가 왔다. 달달한 목소리로 “어디세요? 지금 술집인데 잠깐 올래요?” 그러더라. 성균관대 사거리에 있는 조그만 호프집으로 가니까 다들 이미 얼큰하게 취하셔가지고 “왔어? 앉아. 이름이 뭐랬지? 한잔해, 한잔해” 그러는 거다. 그냥 술 한잔 먹으면서 얘기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며칠 있다가 연우 사무실에서 정식으로 전화주셨다. 합격하셨습니다, 해서 가보니까 합격자 8명 중에 7명이 여자였다.
-그러고서 맡은 첫 작품이 뭔가.
=<명월이 만공산하니>. 황진이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이었는데, 내가 맡은 역할은 황진이의 꾐에 안 넘어갈 것 같은 지족선사라는 큰스님 역이었다. 30여년 도 닦은 스님. 수염 이렇게 기르고 삭발하고. 왜 그 역할을 나한테 주셨는지 모르겠다. 그때 배우가 없었나보다. 큰 역할이었는데.
-봉준호 감독한테 캐스팅 제의를 받기 전까지 영화 오디션은 본 적 없나.
=오디션은 봤다. 스물다섯, 여섯 때 몇편 봤는데 1차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때 ‘준비도 안됐는데 무슨 오디션을 보냐. 정신 좀 차려라 새벽아. 무대에서 더 배울 생각해야지’ 그런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뒤론 영화 오디션 안 봤다.
-영화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뒤 한동안 연극무대에 서지 않았다.
=지난해 말에 <해무>라는 공연을 다시 했는데, 음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일이 많다는 건, 감사할 일
-지난해엔 소속사 없이 혼자 지냈다. 활동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나.
=더 편했다. 워낙 혼자 그렇게 지냈었고. 지금은 회사가 있어서 이런 말씀 드리면 그렇지만, 연극하는데 매니저 와서 들락날락하면 그게 더 불편하다. 뭐 대단한 스타라고 연극하는데 매니저가 차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고…. 그러는 거 영 불편하지 않겠나.
-6월에 <아부의 왕>이 개봉한다. 잠깐씩 출연한 것까지 포함하면 <마더>부터 <아부의 왕>까지 얼추 열편이더라.
=나만 보면 다작, 다작 하는데 그렇게 다작 아니다.
-일부러 휴지기를 안 주려고 하는 건가.
=일을 한다는 건 굉장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일을 못하는 배우들도 엄청 많다. 일이 있을 때 잘해야지. 난 운도 좋고 인복도 많은 거 같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이를테면 봉준호 감독님. 너무 감사하다. 내가 연극 <해무> 하고 있을 때 우연히 공연 보고 캐스팅해주셨는데, 내가 감독이라도 ‘아니 쟤를 뭘 믿고!’ 이랬을 거다. 첫 영화치고 역할이 좀 컸다. 세팍타크로 형사. 나도 놀랐으니까.
-항상 본인은 정극 연기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코미디로 오해한다.
=<방자전> 끝나고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상황이 재밌는 거지 내가 뭔가를 해서 재밌는 건 아니다. 재밌게 봐주셨으니 감사하지만 일부러 웃기려고 액션을 한 건 아니다.
-액션은 절대 크지 않다. 대신 한 문장만 들어도 이건 송새벽이구나 알게 된다. 대사를 본인 입에 밴 말투로 바꾸려고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인가.
=대사를 토씨 하나까지 타다다닥 완벽히 외우진 않는다. 연습하면 틀에 갇힌다. 공식화된다. 그래서 열어둔다. 그래야 현장에서 더 집중력있게 할 수 있는 거 같다. 현장에는 현장의 틀이라는 게 있고 그 틀에 맞춰야 되니까. 내가 혼자서 틀을 만들어가면 분명 틀릴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상대방이 어떤 대사를 칠지 모르잖나.
-얼마 전에 봉준호 감독님에게서 문자 왔다고.
=가끔씩 문자한다. 최근엔 “안녕 새벽. 여긴 유럽의 새벽” 이렇게 보내셨더라. <설국열차> 촬영 준비하느라 지금 프라하에 계신다고 들었다.
-차기작은 임필성 감독의 <주말의 왕자들>이라던데.
=아마도 하게 될 것 같다. 박해일 선배님이랑 같이. 근데 난 하고 싶은데 그쪽에서 ‘새벽씨 미안해요, 다른 사람 캐스팅됐어요’ 이럴 수도 있는 거니까 더이상 말씀드리기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