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고준희] 꽃봉오리를 기다리며 조금씩, 천천히
2012-04-12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건축학개론> <인류멸망보고서> 고준희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의 여자를 ‘약 올리던’, 현재의 어리고 능력있는 여자 은채. 고준희가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선 좀비로 활약한다. 큰 키,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 톡톡 튀는 사고방식은 고준희를 규정하는 일차적인 요소이지만, 아직 그녀의 정체를 모두 파악했다고 하기엔 이르다. 고준희의 멋진 스타일에 가려진 많은 것들을 되짚어본다.

-<건축학개론>의 반응이 좋다.
=놀랍게도 난 아직 못 봤다. 부모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다 봤는데 나만 아직이다. 새벽부터 매일 드라마 촬영의 연속이었다. <인류멸망보고서> 시사회에도 아침에 드라마 촬영 끝나고 바로 넘어온 거다. 얼른 나도 봐야 하는데. (웃음)

-tvN <일년에 열두남자>의 ‘탄야’는 사랑과 섹스에 개방적인 역할이다. 덕분에 고준희란 배우까지 탄야처럼 자유분방한 여자라는 이미지에 일조했는데.
=오종록 감독님과 <건빵선생과 별사탕> 때 함께했는데, 감독님이 무조건 하라시더라. (웃음) 실제로 나는 탄야랑 다르게 보수적이다. 그래서 처음에 (윤)진서 언니 역이 캐스팅되기 전엔 미루 역이 좀 어수룩하고 남자도 모르는 인물이라 그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 탄야 역은 고준희가 아니면 안된다더라. 아니 내가 어떻기에. (웃음)

-작품 선택 자체는 인정에 많이 좌우되는가 보다. 임필성 감독과는 <인류멸망보고서>를 하고 <헨젤과 그레텔>에도 잠깐 출연했다.
=감독님을 100% 신뢰하는 편이다. 잘 맞으면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앞뒤 생각 안 하고 한다. 그리고 내가 A형이다. 친구가 화장실 같이 가자고 하면 굳이 맘에 안 들어도 가는 편이라고 할까. 작품 선택할 때 이런 내 성격도 많이 반영되는 것 같다.

-<인류멸망보고서>는 6년 만의 개봉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찍어놓고 미뤄졌을 때는 속상한 마음도 컸겠다.
=영화계에 대한 이해를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걸스카우트>(2008)도 개봉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오히려 <건축학개론>이 빨리 개봉해서 깜짝 놀랐다. 촬영장에서 송년과 새해를 맞았는데 벌써 개봉까지 다 했으니 나한텐 이게 더 이상한 스케줄이다. (웃음)

-덕분에 한 작품에서 6년 전의 고준희(<멋진 신세계>), 그리고 마지막 편인 <해피 버스데이>에서 카메오로 출연한 현재의 고준희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땐 전지현 언니처럼 내추럴 메이크업에 생머리가 예뻐 보일 때라 무슨 자신감인지 나도 메이크업도 안 하고 당당하게 나왔다. 인터넷에서 과거 장면 캡처해둔 사진을 본 기분이었다.

-좀비 역할이라니, 파격적인 데뷔였다.
=분장이 좀 힘들었지만 현장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땐 영화 촬영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드라마와 다르게 영화는 콘티도 나오고, 컷도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모든 게 재밌고 신기하더라.

-류승범과의 키스신이 화제다. 아름답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극대화된 클로즈업에 기괴함을 보여준다.
=세상에! 그걸 촬영 첫날 찍었다. 콘티를 보고선 무슨 장면인지 몰라서, “감독님, 이거 꽃이에요?”라고 물었다. 감독님이 첫 촬영이니 둘이 긴장도 풀고 친해지라고 이 장면부터 찍는다고 하더라. 그날 영화는 이렇게 찍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해피 버스데이>에서는 짧은 등장에도 코믹함을 제대로 살렸다.
=임필성 감독님 작품에 김지운 감독님이 카메오 연출을 한 장면이었다. 김지운 감독님이 혹시 아나운서 역할 할 여배우 없냐고 연락이 왔더라. 그래서 몇몇을 추천하고선 “저는 안 쓰고 다른 여배우만 하시나요?”라고 했더니 심심하면 기상캐스터 역할을 하라고 하더라. 아마 봉준호 감독님을 비롯해 이 영화의 태반이 다 친분이고 카메오 출연일 거다.

-<건축학개론>도 특별출연이었다.
=<걸스카우트> 때 명필름이랑 인연이 있어서 부탁을 하시더라. 처음엔 그냥 그랬다. 내가 딱히 할 게 없는 거다. 근데 ‘썅년’이란 대사 때문에 한 거다. 시나리오 보는데 그 장면이 너무 웃기더라. 이용주 감독님은 나한테 “한가인한테 적대할 여배우가 있어야 한다”며 같이하고 싶다고 하시더라.

-중요성에 비하자면 비중은 적은 편이다.
=은채는 장면 자체가 많지 않아서 좀 일차원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몇개 안되는 신에서 캐릭터를 설명해줘야 하니 대사로 다 설명해줘야 해서 아쉬웠다. 근데 캐릭터가 괜찮으면 분량은 크게 상관없다. 밋밋한 주연보다 인상적인 조연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나왔지만, 감독님과의 인연으로 다음에는 달라질 공산이 크다.
=안 그래도 감독님이 다음 작품에선 빚을 갚겠다고 하시더라. 액션영화가 될 테니 준비하라고. (웃음) 농담이시지만, 난 키가 커서 왠지 다부진 액션 연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키가 크다는 점이 연기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된 적도 많았나.
=오디션 때 3차에서 실제로 감독님 만나면 ‘키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며 탈락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배우보다도 더 크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 얼굴이 동그란 편이어서 상반신만 잡으면 키가 큰 줄 잘 모른다. 게다가 도회적이고 화려한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역할에 제한이 좀 있는 편이다.

-배우로선 극복해야 할 이미지이기도 하겠다. 세련된 이미지가 절실함을 보여주는 데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나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대중이 내 이미지를 그렇게 인식하고 좋아해준다면 그 부분을 더 잘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제파악을 하고 내 그릇을 정확히 아는 것도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 범주 안에도 다양한 디테일들이 있으니 그걸 개발하는 게 내 몫이다.

-데뷔 때부터 주연이었다. 순탄하고 화려한 출발이었다.
=처음부터 파이팅 넘쳐서 연기를 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교복 모델을 하면서 데뷔하고 <나는 달린다>(2003)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박성수 감독님이 <네 멋대로 해라>를 하고 나서 한 작품이라 화제도 많이 됐다. 그땐 너무 일이 잘 풀리니 이렇게 쉽게 되는 건데 왜들 힘들어하지. 나는 타고났나보다 싶었다.

-기대작이었던 <나는 달린다>가 예상과 달리 성과가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다들 인터뷰하자고 요청하더니 시청률 안 나오니 바로 외면하더라. 학교에서 얼굴도 작고 나름 자신감이 있었는데 웬걸. 연예계에 나와보니 그것도 아니더라. 난 너무 못생겼더라. 자신감도 상실했고 괜히 시작했다 싶었다. 부모님도 내가 이 일 하는 걸 그렇게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워낙 냉정하셔서 당신들 딸이지만, 연예인할 만큼 출중하진 않다고 생각하셨다. 기장이신 아버지는 배우들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어느 날은 나더러 “손예진을 봤는데 너랑은 완전히 뒷모습부터 다르다”고 하시더라. (웃음)

-실망과 좌절이 컸을 텐데, 어떤 계기로 다시 연기를 하게 된 건가.
=학교를 1년 다녔는데, 참 애매한 게 드라마를 했으니 이미 준연예인이 되어 있더라. 그 길로 다시 매니지먼트 회사에 들어갔고 연기를 본격적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물론 이후에 <걸스카우트> 개봉이 늦춰지면서 또 한번 힘든 시기가 왔다. 뭔가 결단을 내리자 싶었다. 당시 (고)현정 언니가 선배로서 또 언니로서 조언을 많이 해줬는데 이름을 바꾼 것도 현정 언니 조언이 컸다. 물론 남들은 다 말렸다. 김은주라는 이름으로 이미 여러 편 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꾸냐는 거였다. 근데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싶더라.

-실패를 통해 톡톡히 수업을 치렀다.
=어릴 때부터 중산층에서 자랐고 실패나 좌절 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었다. 그러니 이 일을 하면서 더 혹독하게 깨달은 거다. 시간을 두고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니 그게 내 일이라서 그렇지 충분히 사람들은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 당장 주목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원히 대세인 건 아니다. 요즘도 <일년에 열두남자>로 새벽부터 촬영하는데 케이블 드라마라 시청률도 안 나오고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은 생각도 들다가, 이 한편으로 평가할 게 아니라 긴 연기생활 중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이 생활을 할 수 있다.

-연기자로서 아직 보여준 것보다 보여줘야 할 것이 많은데. 지금의 자신을 평가한다면.
=얼마 전에 나를 꽃에 비유해보란 질문을 받았는데, 난 일단 씨앗은 뿌려뒀지만 꽃봉오리도 피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남자배우들더러 서른살 넘어야 진짜 배우라고 하는 것처럼 여배우도 나이 들수록 배우의 얼굴이 나온다고 본다. 내 인생의 최대목표는 행복해지는 건데, 지금은 연기하는 게 행복하다. 안 쉬고 하고 싶다는 것도 욕심이다. 천천히 오래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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