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 땐 진짜 없는데 생길 땐 한꺼번에 생기는 것들이 있다. 여기저기서 수개월 밀렸던 원고료들이 한번에 들어온다든지 퇴근길에 식빵을 사왔는데 앞서 아빠도 언니도 한줄씩 사들고 온다든지 평생 없던 남자 복이 한꺼번에 터지기도… 아, 이건 아니구나. 아무튼 드라마도 그렇다. 매번 볼 거 없다, 쓸 거 없다 하며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도 아주 가끔은 ‘오늘 뭘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시기가 있는데, 바로 요즘 수요일과 목요일 밤이 그렇다. 대략 6585일 주기로 돌아온다는 일식과 월식은 아니지만 1, 2년에 한번 정도 지상파 3사 드라마가 같은 날 같은 시간 스타트 라인에서 내달리는 드문 경우, 심지어 이번에는 MBC <해를 품은 달>이나 지난해의 SBS <뿌리 깊은 나무>, KBS <공주의 남자>처럼 독주하는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물 다 빠졌다고 생각했던 ‘남북관계+21세기 왕자님’ 소재를 블랙 코미디로 변주하며 눈길을 잡는 MBC <더킹 투하츠>나, 그 못지않게 뻔하다고 여겼던 ‘절친에서 원수되어 복수하기’ 스토리를 쫄깃하게 이어가는 KBS <적도의 남자>와 함께 직장인들이 가장 피로에 찌든다는 수요일,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주는 것은 SBS <옥탑방 왕세자>다. 세자빈에 간택되기 위해 여동생의 얼굴을 인두로 지지는 섬뜩한 소녀에게 한번 뜨악하고, 왕세자를 사이에 둔 자매의 분위기가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2>에 “제 남편이 제 여동생과…”로 등장할까 두번 긴장한 첫회가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재연 드라마처럼 괴이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300년 뒤로 환생한 뒤에도 이복언니가 여동생을 버리고 미아가 되게 하는 KBS <태양의 여자> 코드, 어설픈 주먹싸움 도중 한대 맞은 재벌가의 후계자가 요트 아래로 떨어져 실종되는 <리플리> 코드 등 낯익은 클리셰들의 잇단 등장에 시청을 포기하려던 찰나, 그들이 말을 타고 시공간을 넘어 현대로 온다. 조선의 왕세자 이각(박유천)과 사서 송만보(이민호), 내시 도치산(최우식), 익위사 우용술(정석원) 말이다.
물론 타임 슬립이라는 테마 또한 이제는 다소 진부해진 데다 자칫 개연성 없는 이야기를 얼기설기 끼워맞추는 도구로만 사용될 위험이 있지만 <옥탑방 왕세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촘촘히 엮어가며 과거와 현대의 충돌을 깨알같이 살려낸다. 다짜고짜 편의점에 들어가 음식을 내놓으라 명했다가 아르바이트생이 “헐~”이라 답하자 자못 위엄있게 “헐값이 아니다! 후하게 쳐줄 것이다!”라고 호령하는 이각의 대사를 비롯해 버스를 처음 타본 조선 총각들이 떠난 길바닥에 쪼르르 놓여 있는 색색깔 스니커즈 등 만화 같은 대본과 연출의 궁합도 제법 좋은 편이다. 특히 아이돌 출신으로는 드물게 무대 조명 없이도 어느 드라마에 갖다놓으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박유천의 천연덕스런 연기와 한양에서는 상위 1%의 인재들이었음에도 서울에서는 단 5분 안에 TV와 밥솥을 박살내고 집에 불을 내는 사고뭉치에 불과한 심복 3인방의 소동은 보고만 있어도 절로 입이 귀에 걸리며 낮 동안 생긴 주름을 펴주는 효과가 있다.
전생에나 후생에나 동생 박하(한지민)를 괴롭히는 세나(정유미)와 사촌 태용(박유천)을 제치고 후계자로 인정받으려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태무(이태성) 등 ‘야망 커플’의 캐릭터나, 신분 증명도 없는 심복들이 커피숍이며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설정 등 전형적이거나 허술한 구석이 적지 않음에도 <옥탑방 왕세자>는 무척 사랑스런 드라마다. “사발라면 하나만 사주옵소서!”라는 신하에게 “내가… 돈이 어디 있느냐!”라며 꼬리내리는 세자 저하를 위해 ‘오.무.라.이.수’ 한 그릇 대접하겠다고 약조하고 싶을 만큼, 때로는 귀여움이 모든 것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