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소선 여사의 말년 생활을 찍은 태준식의 <어머니>를 보며 펑펑 울었다.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것, 완성된 영화에 그녀의 죽음이 담겨 있다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훌륭하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 때문에 울었을 리가 없다. 그분의 공적인 업적과 사적인 인품의 면면 때문에 내가 울었을 리도 없다. 그분에 관한 내 지식은 내 세대의 평균적 수준쯤에서 멈춘다. 간략한 인명사전 분량의 정보가 전부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신문잡지에서 봤던 강골의 인상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눈물이 나서 혼났다.
내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죽음에 관해 대다수 샐러리맨들처럼 무심하게 흘려들었던 내가 울었던 이유가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곱씹고 싶다. 무심하고 게으른 관객이 울 수 있도록 하는 힘은 감상적인 호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흘린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고 동시에 개운하지도 않았다.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겠지만 태준식의 연출은 상투형에서 끊임없이 빠져나가 한 인간의 개별성을 포착하는 힘이 있었다. 이소선의 인간적인 면모, 제목에서처럼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다. ‘어머니’라는 제목은 어떤 규정에 가두고 인물을 바라보게끔 안내한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만인의 어머니이든, 열사의 어머니이든, 노동자의 어머니이든, 하여튼 어떤 식으로 규정되는 걸 굳이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 규정을 벗어나 구체적인 자기만의 무늬와 질감을 가진 아름다운 인간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인간에 대한 겸손한 접근
<어머니>는 이소선 여사가 부쩍 쇠약해진 시기로부터 시작해 병원에 입원해 죽음이 임박한 사정을 보여준 뒤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대적으로 그녀가 더 원기 있었던 몇해 전까지 다다른다. 이 거꾸로 가는 구성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부여받은 시간의 유한성을 거역하는 매체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지금 이 땅에 육신이 없는 그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격한 마음의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의 죽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자료 화면을 통해 그녀가 훨씬 더 젊었을 때의 모습, 사자후같이 내지르는 군중집회에서의 연설장면 등도 짧게 인터컷된다. 중·후반까지의 구성적 흐름을 간단히 반복, 요약하는 듯한 이 후반부의 정서적 리듬도 인간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할머니가 이제 이 세상에 부재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레벨을 높여 환기시키는 아픔을 준다.
이런 흐름에 또 다른 주요 스토리가 끼어든다.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의 삶을 소재로 부산에 거주하는 연극배우 부부가 대만의 연출가를 섭외해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과 연극의 막을 올리는 모습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소선 여사의 일상과 맞물린다. 연극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이소선 여사가 봐주었으면 하는데 그녀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어머니>에 삽입된 장면들만 봐서는 굉장히 미니멀하게 이소선의 삶에 다가선 듯이 보이는 연극의 실제 감흥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의 실제 성취와는 무관하게 연극을 만드는 이들이 보이는 진정성, 한 인간의 삶에 최대한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접근하려는 마음만은 뚜렷하게 윤곽이 잡힌다. 더 결정적으로 관객에게 한방 먹이는 장면이 있다면 감독이 거의 의도적으로 붙인 듯이 보이는, 완성된 연극이 공연되는 장면들 사이로 삽입된 이소선 여사의 짧은 증언 장면이다. 일본인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이소선 여사는 아마도 꽤 많이 되풀이했을 전태일의 최후 장면을 힘들게 회상하는데 어떤 기록 화면을 보는 것보다 생생하다. 분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전태일의 임종을 도와주고자 옆에 있던 의사가 칼로 목을 따 몸속의 화를 풀어줄 때 전태일은 그 와중에도 이소선 여사에게 자신의 소망을 큰 소리로 부탁한다. 피를 보고 황망한 이소선 여사는 처음에 큰 소리로 대답하지 못한다. 피를 쏟으며 전태일이 재차 재촉하자 이소선 여사는 그제야 큰 소리로 답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그 얘기의 내용만큼이나 충격인 것은 그 회상의 자리를 견뎌야 하는 이소선 여사 당사자의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아마도 감독의 것일 듯싶은 누군가가 이소선 여사가 더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도록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것이 <어머니>의 내적 저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소선의 삶을 무대화해 공연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과 이소선의 실제 회상이 얽히는 가운데 그 모든 걸 담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감정적인 꼭짓점에 도달할 수도 있었을 고통의 증언이 계속되는 걸 만류한다. 영화가 누군가의 삶을 재현하거나 기록한다고 할 때 가닿을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창작자의 해석이라는 필터가 드러나게끔 해서 장치의 투명함을 없애는 것이 현대적인 접근법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감히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겸손한 치열함의 중요성이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카메라를 위해 특정 삶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삶을 위해 카메라가 봉사한다. 이럴 때 카메라는 결국 기록하는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뿐이다. 친구가 되어 함께 있어준다는 건 누구에게나 큰 힘이다.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맹세한 것과 그 이후의 삶에서 실천한 것, 그리고 태준식의 카메라가 취하는 태도는 동일선상에 있다.
어머니는 늘 친구들과 함께 있다
나는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문자답했다. 하다 보니 결국 뻔한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이 말밖에는 쓸 것이 없다. <어머니>에서 태준식을 비롯한 스탭들의 카메라는 이소선 여사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했다. 화면 속의 이소선도 늘 친구들과 함께 있다. 전태일을 비롯한 여러 민주열사들, 아들들의 추모제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그녀는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며 지인들과 인사하고 뽀뽀하며 포옹한다. 집에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마다않고 대화를 나누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하릴없는 잡담을 주고받거나 하면서 나이든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안정감을 상대방에게 준다고, 나는 느꼈다.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사는 게 힘들지 않나, 어려운 점은 없나, 뭐가 어렵고 뭐가 즐거운지 그녀는 늘 묻는다. 그런 모습을 태준식의 카메라는 담았다.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식을 먼저 보낸 자신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싸울 때는 매섭게 싸우는 그녀의 공적인 모습 이면에 체화된 그녀의 인품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고통 속에서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지혜의 소유자가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시절의 당당함이 경이적이었고 그런 사람 옆에서 카메라로 친구가 되고자 한 감독의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결국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간 독립영화에 대한 글을 3년간 써오면서 현재의 한국영화계에서 이들 영화들이 가장 진실하게 현재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걸 거듭 확인했고 그만큼 보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쭙잖게 충고나 하고 있는 자신이 좀 한심했다. 글이 더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주변에서도 곧잘 지적받았다. 부족한 필력으로 재단한 수많은 창작인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씨네21> 편집진의 지적에 흔쾌히 동의하며 이제는 고정 지면을 통해 독립영화에 관해 쓰는 건 안 하려고 한다. 다른 지면을 통해 글을 쓰기로 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