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분류해보려 해도, 이병헌은 독보적인 세대다. 그는 최민식을 필두로 한 송강호, 설경구 같은 연기파 배우들과 위치를 공유하지 않으며, 스타성을 토대로 연기성을 구축한 원빈, 조인성 같은 배우와도 공통분모로 엮이지 않는다. 훈련이 아닌 타고난 연기. 세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스타성. 이 두 가지야말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병헌을 구성하는 단일의 것이자 그의 스크린 장악력을 절대적이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17주년을 맞은 <씨네21>은 배우 이병헌을 만났다. 광해군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천민 하선이 가짜 왕의 역할을 하며 벌어지는 팩션사극 <나는 조선의 왕이다>에서 그는 광해군과 하선의 두 캐릭터를 오가는 1인2역의 연기로 촬영에 매진 중이며, 곧 개봉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지.아이.조2>에서 달라진 스톰 쉐도우를 보여줄 예정이다. 연기생활 20년 동안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자신을 쌓아두었지만, 솔직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뒤돌아본 그 길에는 갈등과 의심, 도전과 결단이 매 순간 함께하고 있었다. 안정을 포기함으로써 그가 얻은 무한한 기대의 영역에 성큼 발을 들여놓아본다.
-한창 촬영 중이라 오늘 인터뷰 스케줄은 기적과 같았다.
=정말 드라마 찍는 것 같다. 제작비 부담으로 인해 옛날보다 현장이 많이 타이트해졌다. 미국에서 매일 운동하면서 촬영할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사극은 처음이라 생소하겠다.
=와, 사극하는 사람들 대단하다 싶더라. 수염 달고 상투 틀어 올리는 분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이 교정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잔다고 하던데 아마 비슷할 거 같다. 촬영이 스무 시간이면 스무 시간 내내 입 주변과 머릿속이 가렵다. 그걸 참으면서 계속한다. 촬영이 순간적으로 힘들 땐 많지만, 이렇게 꾸준하게 고통이 동반되는 건 처음이다. 너무 예민해져서 집중이 안될 때도 많다.
-게다가 빼도 박도 못하는 겨울 촬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복을 입었다. 한개도 아니고 두개씩이나. 정말 추워서 미칠 것 같더라. 옷이 죄다 마 소재라서 보온이 전혀 안됐다. 하선을 연기할 땐 그나마 괜찮다. 근데 광해군은 왕이다보니 옷이 구겨져선 안된다. 잘 접히고 구겨지는 소재라 잠깐 짬날 때 패딩도 못 입는다. 한 시간 이상 쉴 것 같다 싶으면 옷 벗고 패딩을 입는다. 대부분은 추운 채로 그냥 참는 수밖에 없다.
-고생해서 그런가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볼살이 확 줄었다.
=살은 안 빠졌다. 오히려 감독님이 사극이니 식스팩 이런 건 안된다고 해서 만든 근육을 다 없애고 있다. 심지어 배도 나왔다. (웃음) 분장하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니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 요즘은 양수리 아니면 문경에서 촬영하는데 양수리 갈 때는 집에서 오전 7시에, 문경 갈 때는 오전 5시30분에 나온다. 쭉 아침 생활에 맞춰서 촬영하면 괜찮은데, 힘든 게 3~4일 정도 이러다가 다음날 촬영이 오후 6시에 잡힐 때다. 그럼 애매한 거다. (웃음) 이날은 오후 6시부터 다음날 6시로 생활 타이머를 맞춰놓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다음날엔 엉망진창이 된다. 아무 때나 졸리고 자야 할 시간에는 잠이 안 온다. 몸이 그래서 축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첫 사극을 ‘시도’할 만큼 이번 역할은 매력적인 캐릭터다. 1인2역이라는 것도 분명 배우에겐 커다란 자극이 될 테고.
=단순히 흥미로 가기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1인2역이라는 구도가 분명 배우에겐 도전지점이지만 온전히 감성만으로 이걸 하게 된 건 아니다. 내가 즐겨야 그게 작품에도 반영되고 결국 관객도 즐길 수 있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긴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잘 안되더라. 이 결과가 최종적으로는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내가 가장 잘하는 부분이라고 판단해서 하는 일이다보니 책임감이 크다. 나 혼자 즐기면 뭐 하나. 관객이 외면하면 그걸로 끝인데. 심지어 다음 작품에도 영향을 준다. 나에겐 이게 생계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가 큰 프로젝트가 된 데는 이병헌의 캐스팅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다들 많이 기대하는데 이번 영화는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드라마다. 시나리오 읽을 땐 재밌었는데 이번엔 좀 특이한 경험이었다. 나도 이 생활을 한 세월이 있으니 보통 작품을 보면 60∼70%는 밑그림이 그려진다. 여기서 나한테 맡겨지는 게 어떤 모습일지는 한 80%가 보인다. 이야기는 감독의 영역이지만 캐릭터는 내가 그리는 거니까 더 잘 보인다. 근데 이번엔 그게 전혀 안 보이더라. 캐릭터가 정확히 어떤지 내가 그 역할을 했을 땐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가더라. 하려고 하는 역할에 대해 이렇게 불안하고 끝까지 모르겠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한 석달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고민의 지점에서 결국 발견한 해법은 뭐였나.
=손 대표(손석우, 이병헌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옆에서 푸시한 것이 컸다. 뭐니뭐니해도 첫 번째로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다. 또 시나리오가 코믹하니 심각한 면 말고 이젠 나한테 이런 면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나쁘지 않다더라. 확실히 이 영화는 한동안 내가 했던 영화들과 달리 대중적인 영화다. 촬영하면서 코믹한 부분이 점점 더 커져서 이제는 완전히 코믹영화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웃음)
한번 사는 인생, 뭐하러 돌다리를 두드리나
-어느 순간부터 출연작이 장르나 소재에 있어서 어둡고 마이너한 측면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더이상 대중성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도 들었고.
=<중독> 때부터 그런 것 같다. <달콤한 인생>도 평단은 인정했지만 관객 수로 보자면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악마를 보았다>는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하고 진지하다가 결국 악역까지 갔다. 그래서 극장에 많이 가는 20~30대 관객은 내 이미지를 굉장히 어둡게 생각한다. 근데 그게 오해다. 왜냐하면 난 불과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되게 웃기는 놈, 실없는 놈, 건강한 대학생 이미지가 전부였다. <내일은 사랑> <폴리스> <아스팔트 사나이> 할 때는 내가 심각한 역할을 한다고 하면 “이병헌이 그런 걸 어떻게 하냐”고 말도 안된다고 했다. 나야 내 역사를 알고 이런 밝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다 있으니 내 이미지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몰랐다. 근데 일년 전쯤 후배가 “형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한 역할만 하는 것 같아”라고 하더라. 그건 너의 오해야, 라고 했는데 가만 보니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더라.
-<나는 조선의 왕이다>의 코믹한 요소가 지금의 기조를 역전하고 대중성을 획득할 바탕이 되는 건가.
=엄밀히 말해 이전까지 관객 수를 보고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었다. <나는 비와 함께 가다>를 한 것도 관객 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을 할 때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름 자기 세계에서 위치를 다지고 있는 놈이 왜 저럴까. 할리우드라고 돌다리인지 스펀지로 만든 다리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가나 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 당시는 나에게 굉장한 격변기였다. 한달 동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지.아이.조>, 세 영화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이 약간 목말라하는 정도에서 작품을 했다면 이때부턴 정말 쉼없이 가게 된 거다.
-관점의 변화가 생긴 건데,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가.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뭘 그렇게 돌다리 두드리나 싶더라. 작품의 결과나 파장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점치려는 걸까, 그냥 나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고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번 해보자 싶었다. 하고서 후회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 그런 마음을 먹고부턴 작품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덜 걸리고 쉬워졌다.
-총 70회차 중 이제 30회차 촬영을 마쳤는데, 절반으로 들어서는 지금의 판단은 어떤가.
=워낙 엉뚱하고 유머러스해서 이런 역할은 자신있을 것 같았는데 간만에 해보니 감각을 잃었나, 잘하고 있나, 스스로 막 체크하게 된다. 요즘은 분열증을 겪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날은 광해군을 연기하고 다음날은 하선이 되어 있는 날도 많다. 보통 1인2역이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역할을 하는데 이건 따지고 보면 세 가지 역할이다. 광해군, 하선 그리고 광해군인 것처럼 광해군 흉내를 내는 하선. 그 디테일한 차이의 수위를 조절하는 게 무척 힘들다. 현장에서 두 인물의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고 하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은 좋지만 막상 그 정도로 분위기를 확연하게 바꾸려는 나는 어마어마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다. 배우들에게 주어진 능력인 순간몰입,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가능하다 싶다.
가장 큰 세계에 가고 싶었다
-일단은 <지.아이.조2>가 먼저 개봉한다. 제작사인 파라마운트가 아시아 지역 흥행의 일등공신으로 이병헌을 꼽았다.
=미국쪽 태도가 굉장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나야 대접이 좋아진 게 다행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참 무서운 사람들이다. 우린 냉정하게 대했다가 갑자기 달라지는 행동을 하면 민망하지 않나. 이 사람들은 그냥 바로 한다. 조금씩 변하는 거면 내가 열심히 해서 그렇구나 할 텐데, 이렇게 급격한 변화라면 내가 아니라 그들이 변한 거다. 반대의 경우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면 소름 끼치는 거다.
-체감온도가 어느 정도인가.
=얼마 전에 에이전시 변경(WME 소속에서 CAA로) 건으로 미국엘 갔는데 겸사겸사 파라마운트 관계자와 존 추 감독을 만났다. 파라마운트에선 1편 때 한국 팬들 움직임을 보고 내심 놀란 눈치였다. 미국은 우리 같은 뜨거운 팬문화가 없다. 레드카펫에서 환호하긴 하지만 톱스타들이 평상시 길에 다니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니 이거 정말 무시할 게 아니구나 판단한 거다. 예고편 음악은 어떻냐,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악 장르가 있냐, 이건 티저 예고편이니 얼마든지 반영해줄 수 있다, 라며 내 의견을 묻더라.
-1편 때는 이런 과정 자체가 없었단 말인가.
=그땐 우리조차 너무 몰랐다. 남들 계약서는 엄청 두꺼운데 우린 그냥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웃음) 아무리 변호사가 해준다고 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선 조항 하나하나를 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례로 1편 때 메이킹 영상을 요청하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배우들이 이렇게 많이 화면에 걸리는데 다른 배우들 초상권은 어쩔 거냐”는 대답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아, 역시 할리우드는 다르구나” 이랬다. (웃음) 이번엔 그쪽에서 먼저 아시아 마케팅을 물어보기에 “혹시 메이킹 좀…” 했더니 다 가져가라고 하더라. (웃음)
-그 정도면 2편 촬영 때부터 이미 위상이 달라졌을 텐데.
=1편 때는 촬영이 없는 날도 무조건 나가야 했다. 몇달 동안 오전 4시30분에 나와서 6시에는 트레일러에 정확히 가 있었다. 분장하고 나면 8시30분 정도. 그 시간부터 스톰 쉐도우 복장을 하고 기다린다. 한 10시간을 그러고 있으면 오후 3시쯤 되면 완전 파김치가 된다. 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졸리고. 그런데도 촬영을 못하고 돌아가는 날도 생긴다. 난 이렇게 고생했는데 시간을 초과해서라도 찍고 싶지만 그들에겐 10분 초과도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럼 그날은 허탕이다. 3시쯤 조감독이 와서 “미안한데 오늘은 촬영이 없을 것 같아”라고 한다. 그런 날이 다반사였다. 그땐 헷갈리더라. 내가 이들한텐 신인이라 그런 건가 원래 여기 시스템이 이런 건가. 긴가민가하니 말도 못했다. 어쩌겠나 초심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이번엔 오후 4시까지 오라고 해서 가보면 다들 준비하고 있다. 분장 끝나자마자 트레일러 갈 시간도 없이 바로 촬영이다. 촬영장에 몇 십대의 트레일러가 있는데 다 고만고만하고 낡은 트레일러고 딱 두개가 큰 트레일러다. 하나가 드웨인 존슨 거고 다른 하나가 내 거다.
-그 결과 2편에선 스톰 쉐도우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거의 주인공이다, 라는 기사가 나왔던데 그건 아니다. 스톰 쉐도우의 분량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양적으론 1편보단 조금 는 정도다. 근데 확실히 스톰 쉐도우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건 변화다. 1편에선 내가 백그라운드에 그냥 서 있는 장면도 많았다. 나왔는데 보이지 않을 때도 많고, 그냥 따라다니는 장면도 있었다. 2편에선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등장하면 어쨌든 내 스토리가 진행된다. 내용 면에서 보면 엄청난 발전이다. 얼마 전 존 추 감독이랑 통화하는데 스톰 쉐도우 장면은 편집에서 거의 다 살렸다고 하더라. 기분이 좋았다.
-이병헌이란 배우가 획득한 확고한 스타성에 파문이 필요했던 걸까. <지.아이.조>가 그런 기능을 했다.
=일종의 도발이었다. 잔잔한 물에 돌 던지고 싶은 기분이다. 연극배우라면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고 싶고, 가수라면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자기가 있는 분야에서 가장 큰 세계에 가고 싶을 거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기회가 왔는데 굳이 망설이고 겁낼 필요가 있나.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안정적인 것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말자 싶었다. 물론 그런 결정을 할 때 걸리는 것도 많다. 당장 영어는 어떻게 배우지. 원어민은 내 발음이 이상하다고 느낄 텐데. 아시아적인 것이 신비로움을 줄 수 있지만 그건 또 잠깐일 텐데. 이것저것 따져보니 내가 정말 잘한 걸까, 웃음거리가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귀찮고 까마득한 것 투성이고 도대체 내가 뭘 결정한 거지 싶어진다. (웃음)
아직은 할리우드에 조종받는 느낌
-<지.아이.조>는 배우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을 위한 서막과 같은 작품이 됐다.
=사실 내 필모그래피는 굉장히 들쭉날쭉하다. <공동경비구역 JSA> 하고 나서 입봉 감독이 연출하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이해를 못하더라. 가끔 내 의지가 아닌데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순전히 감성에 꽂혀서 결정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다. 근데 <지.아이.조>는 유일하게 내가 전략적으로 도전한 작품이다. 에이전시도 그렇고 다들 이건 꼭 했으면 하더라. 스톰 쉐도우가 가진 영향력은 미국 문화권에선 굉장히 큰 거고 분명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비록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할리우드 데뷔는 아니지만 그 길까지 가는 좋은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거다, 라는 생각으로 결정했다. 근 1년을 끌었다.
-결과적으로 선택이 나쁘지 않다. <지.아이.조>에서 스톰 쉐도우의 매력은 절대적이다.
=처음엔 그런 것도 모르겠더라. 그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때문에 홍콩이랑 중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정)우성이 형도 참 대단하다고 하더라. 체력이 되냐고.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끝나자마자 분장피 잔뜩 묻힌 채로 물티슈로 닦으면서 <지.아이.조> 촬영을 위해 LA로 갔다. 비행기 내리자마자 <지.아이.조> 의상 피팅을 하러 가는데 가봉한 옷을 입고 깜짝 놀랐다. 전대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러고 있는데 마스크를 가져오고, 또 기구를 가져오더라. 그걸 보고 이건 아니다! 했다. 쌍칼 들고 하늘을 날아야 하다니. 그 순간 잠에서 확 깬 기분이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아무 말 없이 옷 벗고 매니저한테 내일 미팅 잡아라, 미안하지만 난 못하겠다, 실수였다, 한국 가겠다, 라고 말할 거라고. 물릴 수 있다면 진짜 무릎이라도 꿇으려고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선 절대 안되는 일이다. 때로 긴가민가한 순간은 있다. 근데 이렇게 확실하게 ‘하면 안된다’ 한 건 처음이었다. 심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근데 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쨌든 내가 결정한 건데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되겠더라. 운명을 믿는 편인데 ‘될 거면 이런 기구 타고도 될 거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피해 없이도 좋은 공부가 될 수도 있을 거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리우드 진출 수순에 있어서 지금 단계를 점검한다면.
=아직 2편이 공개가 안됐으니 이렇다 하게 달라진 상황은 없다. 2편이 성공하고 업계 사람들에게 눈에 띄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두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주연은 아니지만 멋있는 캐릭터다. 슈트 차림이니 겉모습도 그럴싸하고.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게 맞는 거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니까. (웃음) 어느 순간엔 내가 선택하는 입장이 돼야겠지만 아직은 할리우드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느낌이 더 크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인터뷰야 워낙 오랜만이고. 그냥 주변에서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뭔가.
=제일 큰 건 역시 결혼이다. 얼마 전 동생(이은희) 결혼이 컸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난 항상 엄마, 동생, 찰스(이병헌의 해외 매니저)와 같이 살았는데 돌아보니 동생도 찰스도 결혼한 거다. 게다가 손 대표, 회사 회계 보는 친구처럼 보통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중요한 모든 사람들이 최근에 다 결혼했다. 스케줄이 없고 노는 기간이었다면 심란했을 것 같다.
-보통 그럴 때 자신을 향한 총체적 반성이 시작되지 않나. (웃음)
=아직까지는 정신이 없다. 동생 결혼식도 식을 치르는 게 나한텐 중요한 일이었다. 결혼식 날은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동생이나 엄마가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잘 아니까 내가 정신 안 차리면 큰일나겠다 싶더라. 결혼식 이틀 뒤에 동생에게 전화를 했는데 “나 촬영장인데 어디냐” 했더니 집이라더라. “엄마 좀 바꿔줘” 하니까 “아니, 우리집이라니까” 하더라. 전화를 끊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더라. 엄마가 정말 외롭겠구나. 나는 몰라도 엄마한테 딸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데. 그런 생각들이 막 들더라.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던데. 그런 취미생활을 한다니 좀 생소하다.
=이거(인터뷰 때 이병헌은 텀블러에 든 커피를 가지고 왔다) 내가 만든 거다. 내가 바리스타인데 남이 만든 걸 어떻게 먹나. (웃음) 심각하게 한 건 아니고 아는 형이 같이 다니자고 해서 따라가게 됐다. 마침 <악마를 보았다> 찍고 나서 시간이 좀 있어서 갔는데 해보니 재밌더라. 직장 다니는 생활하곤 달라서 이 일을 하다보면 갑자기 시간이 턱 하고 주어졌을 때 뭘 하지 싶을 때가 많다. 그냥 멍하니 있으면 시간 아까운데 그럴 때 평안해질 수 있는 것들이 뭘까 고민하게 된다. 와인도 배우고 싶다. 잠 안 올 때 한잔 원샷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이 작은 병 안에 담긴 와인의 역사를 알면 내게 주어진 빈 시간들이 좀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영화도 집에서 혼자 보는 편이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도, 와인을 마시는 순간도, 영화를 보는 순간도 흐트러지고 정신없었던 내 생활을 침전시키는 시간들이 되어준다.
-배우고 도전하는 데 열려 있는 건 좀 의외의 모습이다.
=그런 것들에 폐쇄적이지 않다. 원래 성격도 호기심 많고 엉뚱하고 이것저것 들춰보는 편이다. 사람들은 내가 유명하고 그러니 웬만한 건 눈에 차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싫다. 그러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예능 프로그램이나 토크쇼 안 나간다고 폐쇄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대부분 예능 프로그램이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배우가 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야기하다보면 결국 자기 합리화고 변명이 된다. 그런 툴이 잘 맞고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한텐 아니다. 그외의 측면에선 난 열려 있다.
-요즘 케이블TV에서 <내일은 사랑>을 보니 새롭다. 1992년부터 방송됐으니 데뷔 때 모습이다.
=20년 전 모습을 그렇게 보여주는 건 명백한 테러다. 혼자 보는 것도 낯뜨거운데 그걸 전국 방송에 내보내다니. (웃음) 다시 보니 진짜 어리더라. 볼살이 얼마나 통통한지. 그때 내 별명이 오리궁둥이였다. 백바지가 한창 유행이라 터질 것 같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연기라기보단 정말 그런 대학생 같았다. 덕분에 <내일은 사랑>이 동시대 관객에게 끼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땐 매니저도 생소했다. 특히 나 같은 공채 출신은 더 그랬다. 7년 동안 매니저 없이 다녔다. 스타일리스트도 없어서 입고 나온 옷이 다 내 옷이다. 그 주 분량이 4일치면 네 가지 착장을 맞춰서 가는 거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 보여주자는 마음은 있었다. 내가 TV 보면서 항상 의문이었던 게 왜 자다가 일어나도 배우들은 다 화장을 하고, 예쁠까였다. 진짜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해야지 싶었다. 그래서 머리를 일부러 막 헝클어뜨리고 접히게 드라이를 했다. 그런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전엔 없었다. 주변에선 뭐 저렇게까지 망가질 필요가 있나 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시청자에게 반응이 오더라. 얼마 전에 <내일은 사랑>팀이 다시 모였는데 윤석호 감독님이 그 뒤 이야기를 2부작 단막극으로 해봐도 좋지 않을까 하시더라. 그땐 캠퍼스가 배경이었는데, 범수는 건축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거다. 근데 다시 만나서 얽히면 <사랑과 전쟁>이 되는 건가. (웃음)
-<내일은 사랑> 이야기가 나온 김에 1991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뒤 벌써 연기 20년차다. 액션 연기가 부쩍 늘었는데 힘들지 않나. (웃음)
=회사원들은 과장, 부장 될 거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대신 적지만 꾸준히 돈을 벌고, 본인이 아프면 대신 해줄 사람도 있다. 근데 우린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아, 정두홍 무술감독이 있구나. (웃음) 지금 와서 다른 걸 할 수도 없고. 돌이켜보면 내가 연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릴 때 동네에선 대장이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막상 학교에서 발표하라고 하면 말을 못했다.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게 너무 창피하고 힘들었다. 아역배우였던 동생을 알던 다른 배우의 어머니가 “넌 탤런트 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하기에 말도 안된다고 했는데, 이젠 이게 내 평생 직업이 됐다. 근데 참, <나는 조선의 왕이다>는 대중이 좋아할 영화라고 했는데 흥행이 안되면 어떡하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