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1986 시 <유리닦는 사람>으로 등단
1995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발표
2002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3~현재 소설 <참말로 좋은 날> <지금 행복해> <인간적이다>,
산문집 <즐겁게 춤을 추다가> <농담하는 카메라> <칼과 황홀>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 성석제의 이야기 샘은 20년이 넘도록 마른 적이 없다. 그는 때로는 칼럼니스트로, 때로는 문학집배원으로, 때로는 인터넷 연재작가로 종횡무진해왔다. 그렇게 소설의 안팎에서 그의 글은 무위의 잡담(雜談)으로서 우리의 심심함을 달래주었다. 하여 간만의 장편 <위풍당당>으로 돌아온 그에게 잡담을 청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종일 하늘은 맑았고, 라디오에서는 선거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재담은 봄바람보다 청량했고, 개표결과보다 예측불가였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달이 기운 저녁에 인사동 어귀의 막걸릿집에서 한잔 걸친 채 만났더라면 그는 분명 더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를 끌러놓았으리라. 종종 취기가 완연한 그의 글을 닮은 취중잡담이 되지 못해 아쉬운, 그러나 그의 글처럼 가볍고 통속적이길 바랐던 대화를 전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님의 장편입니다.
=나도 이렇게 오래된 줄 몰랐어요. 단편집이나 산문집은 1년에 1권꼴로 계속 내서 그런가. 3, 4년 전에 장편소설이 안 나오는 나라는 망한다며 주변에서 하도 잔소리를 해대더라고요. 오히려 오기가 들어서 정말 망하나 보자 싶었죠. (웃음)
-장편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와중에도 긴 호흡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어요. 다만 억지로 짜내기는 싫었고 자연스럽게 익기를 기다렸어요. (청탁을 받아서 쓰는) 소설에는 자연산이란 게 없으니까 자연류 정도로 이름붙일 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고 싶었는데 따로 없다 하셔서 놀랐습니다. 단편은 장소를 옮겨다니며 쓰신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장편의 경우에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위풍당당>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셨는지요.
=설악산 백담사에 만해마을이라는 문인 창작 집필실이 있습니다. 거기서 2년 전에 2 개월 정도 있으면서 앞의 절반을 썼고요. 나머지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보내주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베를린에 갔을 때 썼습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은 어디서 쓰느냐에 더 많이 좌우돼요. 새로운 장소가 채워주는 에너지나 호기심이 작품 속으로 들어올 여지도 더 많고요. 그런 면에서 작가들은 화전민이나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면서 땅의 힘, 생명의 힘을 빌리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강마을에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식구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취미 삼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을 무렵 한강 하류쪽에 고기잡이배가 떠 있는 걸 봤어요. 한강에도 어부들이 있다고 하대요. 옆에는 뭘 거두어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같은 집안사람처럼 보였어요. 아직 자전거 도로가 닦이지 않았을 때라 위쪽 도로에서 내려다보자니까 강가에 집이 있는 건가, 있다면 강변이나 하천 부지는 국 유지일 텐데 그 사람들 주민등록지는 어디로 되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더라고요. 그게 소설의 씨앗이 될 줄은 나중에 알았죠.
-어떻게 강마을에 모인 사람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드라마 세트장을 선택하셨습니까.
=인간의 조작이 가장 심하게 가해진 공간을 그들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나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가짜에 진짜가 섞여 들어가는 거죠. 가족이라는 제도도 가짜가 되어가고 있잖아요. 진짜 가족과는 대화도 없으면서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언니, 오빠, 이모, 형님이라고 부르며 더 진한 가족애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진가가 뒤섞이는 것이 인간의 총체적 풍경이라고 생각해요. 그 모습을 가치판단하지 않고 보여주려고 했어요.
-정묵이 이끄는 조폭 일당도 그 풍경의 일부입니까.
=정묵은 돈이 깡패가 된 세상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나름 진보 조폭이랄까. 애들을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가 명품 슈트와 구두를 인터넷에서 할인가로 사는 인물이라는 설정의 디테일함에 빵 터졌습니다.
=나는 유니클로에서 나오는 옷 같은 거 사 입는 사람이라 내 경험담은 아니고요. 정묵은 형편은 안돼도 폼은 잡고 싶을 테니 부하들 몰래 방문 걸어잠근 채 인터넷 쇼핑도 할 것 같아서 넣어봤어요.
-독자들에게는 4대강 사업이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과 떼어놓고 읽기 어려운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게 4대강 사업에 관한 말이 나오기 전, 대운하를 하니 마니 할 때였어요. 그래서 독선적인 개발이나 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정도였죠. 그러다 거의 다 써갈 때쯤 4대강 사업이 시작됐는데, 지난해 초에 어떤 방송 프로그램 일로 고향인 경북 상주의 경선대를 방문했다가 처참하게 변한 풍경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어릴 때 할머니 손을 잡고 40리를 걸었던 곳이거든요. 그 충격이 소설 속으로 전이돼 들어온 거죠. 개발의 방식이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파괴적이어서 문장도 그랬으면 했어요. 소설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생경해서 사람들이 이런 걸 왜 집어넣었지, 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소설가도 어느 정도 사회적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보십니까.
=자연인으로서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투표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변모시켜나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죠. 하지만 소설가로서 소설에 어떤 의무감을 집어넣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식의 인위적인 조작을 하면 소설이 망가져요. 오히려 독자를 소외시킬 수 있죠. 진정으로 그런 생각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잠시 생각) 모르겠는데요, 방법을? (웃음)
-선생님이 소설가로서 느끼는 사명은 반대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입니까. 과거에 어느 인터뷰에서 “사람이 살면서 웃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내 소설까지 웃는 시간을 뺏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웃음의 함량을 높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봤습니다.
=그때는 그랬나봐요. 지금은 별 생각이 없어요. (웃음) 그게 의도를 가지고 하면 생각대로 잘 안된단 말이죠. 나라도 더 웃겨드려야겠는 생각을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웃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에도 애드리브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능하지요. 연기보다는 느리게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런 요소가 들어가면 전체적인 문장이 가벼워집니다.
-선생님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써내려간 대목들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여산과 영필이 방귀를 대차게 뀌는 장면은 선생님께서도 킥킥거리며 썼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별로 안 웃기다고 생각해요. 내가 먼저 웃어버리면 힘이 약해져요. 보는 사람은 ‘왜 혼자 웃어?’ 하는 반응이 되거든요. 그리고 일상에서의 웃음의 코드와 소설에서의 웃음의 코드는 달라요. 일상에서는 일회성이 강하고 순간적 폭발력이 있는 유머가 잘 통하지만 소설에서 웃음은 논리적 귀결로 나오는 거예요. 소설적 유머에는 나름의 발생양식이 있달까요.
-<참말로 좋은 날>을 비롯해 2000년대 중·후반에 발표하신 작품들은 특유의 웃음기가 휘발된 다소 어두운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때는 내 눈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웃음이 안 나올 수밖에요. 남의 상처도 오래 들여다보면 자기 상처처럼 아프거든요. 그렇게 앓고 나니 또 가벼워질 수 있더군요.
-선생님께는 가벼움이 중요한 소설적 요소입니까.
=그런 편이에요. 무거운 외투나 껍질로는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아요. 솜털 같은 가벼움을 쌓아서 무겁게 만들 수도 있다고 봐요.
-더불어 통속성을 중시하시는 것은 어릴 때 읽은 연애소설이나 무협지의 영향인가요.
=아마 그렇겠죠. 그런 통속소설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잖아요. 내가 어릴 때 처음부터 굉장히 센 걸 읽었어요. <사랑이 메아리칠 때>라는 소설이 방바닥에 굴러다니기에 사랑이 메아리칠 수도 있나 궁금해서 열어봤는데 여자친구의 어머니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는 대학생 이야기였어요. 읽다가 집어던졌죠. 어떻게 이런 책을 어린애들이 볼지도 모르는데 아무렇게나 던져놨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장롱 뒤에 감췄어요. 근데 결말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먼지 구덩이에서 꺼내서 확인했더니 어머니가 그 대학생을 받아줘서 같이 여행을 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불이 꺼졌습니다. 거기서 또다시 집어던졌죠. (웃음)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나니 <갈매기의 꿈> 같은 게 성에 찰 리가 있나요.
-첫 단편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때부터 선생님 소설에 빈번히 등장해온 것 중 하나는 술입니다. <위풍당당>에도 강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신 뒤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선생님은 소설에 어느 정도의 취기가 도움이 된다고 보십니까.
=어느 소설에나 도취와 몰각의 순간은 필요해요. 그 순간에 가장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술인 거죠. <위풍당당>에서 사람들이 술을 먹고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이유는 정묵 일당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일 거예요. 한편으로는 단결해서 먼저 쳐들어온 네명을 해치운 성취감도 있을 거고요. 그러면서 생긴 유대감을 확인하고 싶어 술판, 춤판을 벌인 거겠죠. 그걸 그럴 법하게 만들기까지 애를 좀 먹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책 전체에 술 마시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일부러 자제할 때도 있어요. 너무 많이 나오면 사람이 무책임해 보이거든요.
-그것이 소설가로서 술을 다룰 때 지키시고자 하는 법도라면, 술꾼으로서 지키시고자 하는 주도(酒道)는 무엇입니까.
=그런 건 없는데. 아, 하나 있네요. 외상하지 말자. 주사도 별로 없고 술 마시다가 12시쯤 되면 자는 정도예요. 가끔 눈떠보면 혼자일 때도 있어요. 그러다 술값을 뒤집어쓴 적도 몇번 있어서 이후로는 12시 전에 집에 갑니다. 그래서 한때는 제 별명이 ‘성데렐라’였어요.
-시인일 때는 산문시를 많이 쓰셨고, 소설가가 되신 뒤에는 시처럼 짧은 단편소설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시를 시이게 하는 것과 소설을 소설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이것은 시다, 라고 생각하고 쓰는 게 시고, 이것은 소설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소설이지요. 두 번째는 읽는 사람이 이것은 시구나, 아니면 이것은 소설이구나, 하고 읽어줘야 하고요. 마지막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시이거나 실제로 소설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시라면 읽는 사람이 소설이구나, 하고 읽어도 시가 될 수 있어요. 이 세 가지 중에 두 가지 이상이 충족돼야 시다, 혹은 소설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죠.
-간혹 다른 활동은 금하고 소설 집필에만 집중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선생님의 관점은 다른 것 같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친구(故 기형도 시인을 말함-편집자)와 정립해둔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1. 청탁이 오면 쓰자. 그게 프로다. 2. 청탁이 안 오면 안 쓴다. 그게 프로다. (웃음) 그때는 청탁이 별로 안 왔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죠. 근데 그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후로는 원칙을 바꿀 수 없게 됐어요. 그래도 소설이 논농사라면 나머지 산문은 밭농사라고, 깨, 고추, 마늘, 양파 농사도 나름 재미있어요. 소설에 써먹을 수 없는 문장도 있으니까.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하십니까.
=별로 안 해요. 인터넷 연재를 몇번 했었는데, 나보고 댓글도 달라고 하더라고요. 하면서 이걸 왜 해야 하지 싶었어요. 원고료도 안 주는데. (웃음) SNS도 마찬가지예요. 몇 마디라도 문장을 썼으니까 일한 기분인데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소모되고 말잖아요. 그럼 굶어죽겠죠. 싫어요, 그런 거. (웃음)
-모교인 동국대 문예창작과의 교수직을 고사하신 적이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생활의 안정은 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물렀던 건 아니에요. 연수까지 받았는데 교수직이 영 나한테 안 어울리는 걸 알았어요. 굶어죽진 않을까 반나절쯤 고민하다가 그만뒀죠. 그걸 한참 뒤에 어느 기자가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미화해 난감했어요. 흔히 하는 말로 기사를 쓰지 않고도 기자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하잖아요. 소설가도 소설을 쓰지 않고도 소설가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죠. 그 핑계로 만날 놀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