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의 황금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1950년대였다. 연간 500편에 가까운 영화가 쏟아지던 그 화려한 시대의 중심에서 우리는 우치다 도무를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일본 최고의 감독으로 우치다 도무를 꼽았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선택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다. 우치다 도무야말로 당대 일본사회의 진실과 모순을 가감없이 담아냈던 리얼리즘의 거장이자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우치다 도무, 사무라이영화의 지적 유희
<땀>(1929)이나 <흙>(1939) 같은 작품을 통해 주로 노동자의 시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우치다 도무였지만 사회성 짙은 작품들만 찍었던 것은 아니다. 1922년 감독 데뷔와 함께 일본영화사의 리얼리즘을 확립한 그의 재능은 1950년 이후 다양한 장르영화, 정확히는 사무라이 시대극을 통해 다시 한번 꽃피운다. 1945년 전쟁포로로 잡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공백기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후 자신의 대표작이 된 전복적 사무라이 활극 <후지산의 혈창>(1955)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시네마테크와 일본국제교류기금이 함께 마련한 이번 ‘사무라이 액션 특별전’에서는 활극영화를 통해 새로운 재능을 만개시켰던 50년대의 우치다 도무를 만날 수 있다. 대표작 <후지산의 혈창>을 비롯하여 사무라이 활극의 진수를 보여줄 <대보살고개> 시리즈, 눈부시게 아름답고 처연한 복수담 <요시와라 요녀 이야기>(1960) 같은 시대극은 물론 그의 진정한 정수가 녹아 있는 걸작 <기아해협>(1964)까지 총 8편의 영화가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사무라이영화라 하지만 우치다 도무의 시대극은 단순한 액션 활극과는 거리가 멀다. <요시와라 요녀 이야기>나 <대보살고개> 시리즈에서의 장르 변주도 그러하지만 13년 만의 재기작 <후지산의 혈창>을 보면 그의 성향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사무라이와 함께 귀중한 찻잔을 운반하던 하인 곤바치가 술주정을 부리다 살해당한 주인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기존 사무라이 장르영화의 관습을 절묘하게 비틀며 계급의 위선과 허위를 조롱한다. 사무라이영화란 기본적으로 액션을 뼈대로 한 장르영화지만 우 치다 도무의 손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삶의 모순을 드러내는 지적 유희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땀내 나는 사무라이 장르 특유의 쾌감이 모자라지도 않는다. 장르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놓쳐선 안될 작품은 그의 영화적 야심이 낳은 걸작 <기아해협>이다. 전후 혼란기 살인, 절도, 방화를 저지른 범죄자와 그를 쫓는 노형사의 10년에 걸친 이야기를 담아낸 대작이다. 상영시간만도 3시간이 넘는다. 2010년 <키네마 준보> 선정 역대 일본영화 베스트3에 오를 만큼 높이 평가받은 이 작품은 당대 일본사회의 모순과 불안은 물론 피폐한 당시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등 전후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포로 생활을 했던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과 장르영화를 만들면서도 끝끝내 놓지 않았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그는 거장의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미스미 겐지, 과장된 영상미학의 쾌감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휘두른 칼날에 따라 분수처럼 솟구치던 핏줄기를 기억하는가. 사무라이영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검술 액션의 절제된 화려함은 세상에 미스미 겐지의 존재를 알렸고, 미스미 겐지는 사무라이영화 고유의 과장된 영상미학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렸다. 우치다 도무가 사무라이영화를 지적으로 비틀 때 미스미 겐지는 사무라이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해 정면으로 돌파했다. <자토이치>(1962), <아들을 동반한 검객>(1972) 등의 작품을 통해 국내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미스미 겐지는 그렇게 전통적인 시대극에 매혹적인 자극과 감상적인 유치함을 더함으로써 오늘날 사무라이 활극 장르를 완성시켰다. 4월26일부터 5월6일까지 열리는 ‘사무라이 액션 특별전’에서는 미스미 겐지의 진면목을 소개해줄 영화를 엄선, 준비했다.
당연하지만 사무라이영화는 일본의 대표적인 로컬 무비다. 독특한 지역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해당 문화권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특권적 장르라고 볼 수 있는 사무라이영화는 일본문화의 맑은 윗물만을 길어 올린 정제된 문화상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스미 겐지 감독이 그것을 지극히 보편타당한 장르적 형식 안에 포섭한다는 사실이다. 빠르고 소란스런 홍콩 무협과 달리 정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미스미 겐지식의 사무라이 활극은 엄격하고 통제된 미장센을 통해 상품으로서 압축된 ‘일본적인 것’의 정수를 선보인다. 반복되는 상투적인 액션, 과장된 표정과 연기, 정적인 액션으로 상징되는 그의 영화는 때론 촌스럽고 노골적이어서 도리어 멋진, 장르영화의 교본과도 같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기괴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요츠야 괴담>(1959)과 하나의 시리즈가 된 <자토이치>와 <자토이치혈소려>(1964), 사무라이 액션영화의 대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검 3부작’ 중 첫 번째 영화 <운명의 아들>처럼 잘 알려진 작품뿐만 아니라 검도부가 배경인 현대물 <검>(1964)같이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도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자토이치>처럼 사무라이 활극인 동시에 야쿠자영화의 전조가 되는 <무숙자>(1964)와 개성적인 현대물인 <검>을 극장에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꼭 봐두길 권한다. 특히 도와대학 검도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검>은 피바람이 일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사방에 나뒹구는 그의 다른 시대극들과 달리 검의 세계를 믿는 순수한 신입부원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무라이영화들에서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는 검도의 정신과 드라마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 밖에도 가쓰 신타로라는 걸출한 스타와 함께 시리즈물로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야쿠자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토이치>의 맹인 검객, <운명의 아들>의 라이조와 같은 복수에 매달리는 허무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개성을 통해 장르영화가 남기는 강렬한 인장과 그것의 반복적 활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B급영화적 감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전세계 B급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미스미 겐지의 영화들부터 만나보라.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될 7편의 작품들이 그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