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의 머리는 짧고, 하얗다. 세 번째 삭발투혼으로 알려진 <봄,눈>의 히로인다운 ‘길이’였지만, 노인을 연기했던 <덕혜옹주>나 <위트> <영영이별 영이별> 등의 공연을 본 적이 없는 입장에서는 낯선 ‘색깔’이다. 기억 속의 윤석화는 커피 CF의 주인공이었고, 단막극 <샴푸의 요정> 속 괴팍한 노처녀 상사였다. 어느 잡지에서인가, 사진작가 조세현이 찍은 짧고, 덜 하얀 머리의 사진을 본 적은 있었다. 공연을 본 적이 없다, 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윤석화는 “연극은 기록이 없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런 매력 때문에 연극을 했어요. 공연 때 받았던 감동이든 재미든 의미든 그때 반짝였으면 된 거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37년 정도 하고 되돌아보니 남은 건 사진 몇장이더라고. 그런 게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레테의 연가>(1987) 이후 24년 만에 출연한 영화 <봄,눈>은 이제 “낼모레면 환갑”인 윤석화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녀의 짧은 머리에 대한 기록, 흰머리에 대한 기록, 무엇보다 대중에게 알려진 윤석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윤석화에 대한 기록.
<봄,눈>의 주인공인 순옥은 엄마다. 평생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고생했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인가, 죽어간다. 평소 제각각의 방향으로 살던 가족이 엄마의 투병으로 한곳에 모이고, 엄마는 그들을 위한 준비로 여생을 보낸다. 영화, 드라마, 소설뿐만 아니라 당장 내일 겪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영화는 소재의 통속성을 밀어붙이는 대신, 생생한 이미지의 힘을 드러낸다. 영화의 첫 장면. 어렵게 일자리를 구한 엄마 순옥은 새벽 첫차를 기다린다. 순옥이 버스에 타면 카메라는 잠시나마 잠을 청하고 있는 또 다른 순옥들을 비춘 뒤에야 그들의 틈에 자리를 잡은 윤석화를 보여준다. 짧은 머리의 윤석화보다 그곳에 있는 윤석화가 더 궁금했다. 성공한 예술가, 두 아이의 엄마, 영국에서 공연 프로듀서로 바쁜 그녀는 왜 이 첫차를 타게 됐을까. “작품이 가진 선한 영향력이 내 가슴에 닿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문했죠. 순옥을 연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뭐지? 그저 지금쯤에서 일상적이고 소탈한 모습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봄,눈>이 아니라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을 맡아달라고 했으면 주저했을 거예요. 이제는 나이가 들었잖아요? 혹자는 나를 보고 아직 섹시하다고 하고, 도회적이라고도 하지만 물론 그런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웃음) 그런 이야기는 별로 자신이 없어요.”
“할머니 역 때문에 이를 뽑으려 했었어요”
젊은 시절에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CF에서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예요”라고 했던 그때, 영화를 멀리했던 이유를 물었다. “사실 <레테의 연가>를 하고서는 제안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 상처가 좀 있었죠. 그냥 솔잎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는 좋은 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고 있었는데, 내 나이가 많아진 거죠.” 그녀에게 <봄,눈> 이전에 제안받았던 영화 속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윤석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는 그녀 스스로 너무 뻔하게 보인 화려한 엄마였고, 내심 마음이 있었지만 일정상 연기할 수 없었던 여자들은 약간의 공주병이 있거나, 적나라한 아줌마나 여든살의 치매 노인이었다. “할머니 역이 들어왔을 때는 이를 뽑으려고 했었어요.” 그러니 그녀의 삭발투혼과 염색하지 않은 머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봄,눈>이 세 번째라면 네 번째 삭발도 가능할 것이고, 다섯 번째에는 정말 이를 빼려고 할지도 모른다. “복구가 가능하잖아요. (웃음) 이는 해넣으면 되고, 머리는 알아서 길 테니까. 다리를 자를 순 없지만 작품에 확신이 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당연히 <봄,눈>의 삭발연기 역시 윤석화가 먼저 제안했다. 그녀는 워낙 군더더기 없는 영화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날것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순옥의 감정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감독에게는 일단 롱테이크로 가자고 했다. 그래놓고는 혼자서 떨었다. 촬영 당일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녀의 연기를 지켜봤었다. 암에 걸린 엄마가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자,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는 설정의 스펙터클보다 그 순간의 가위소리가 더 자극적이고 무섭게 들린 현장이었다. 윤석화 자신도 “그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줄 몰랐다”. “그 순간 순옥이가 된 것 같아요. 가위소리를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이상한 울음이 튀어나왔어요. 그때 이렇게 계속 울어야 할까, 수습을 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분명히 순옥이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울지 않으려고 하면서 또다시 잘랐죠. 그런데 또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당시 촬영을 마친 윤석화는 오히려 미안함에 울고 있던 감독을 위로했다.
“또 영화를 해도 될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자, 윤석화는 “내가 또 영화를 해도 될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연기력을 품평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한편의 영화가 아닌 배우 윤석화에 대한 기록으로 볼 때, <봄,눈>이 다소 아쉽기는 했다. 순옥은 죽는 순간까지, 남겨진 가족들을 걱정한다. 한번쯤은 가족이 아닌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오열하고 괴성을 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담겼으면 했다. 허스키하면서도 따스하게 들리는 윤석화의 목소리가 쇳소리로 변하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순옥이 자신의 엄마와 전화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에서는 자신을 위해 목 놓아 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감독님은 그 장면에서 절제하셨더라고요. 감독의 선택이기 때문에 나도 좋다고 했어요.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죠. (웃음)”
윤석화는 앞으로 약 2년간 자신이 도전할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국에서 제작하는 작품들, 아이들 뒷바라지, 다시 한국에 와서 하고픈 연극과 뮤지컬 등.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하얀 머리의 그녀가 지독한 사랑을 그리는 영화를 만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24년간 남기지 못한 기록들이 그제야 온전히 담길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