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멋진 악몽>의 홍보차 한국에 온 미타니 고키 감독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이후 그의 팬이 된 나는 항상 궁금했다. 무리하지 않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도무지 ‘각’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이야기로 그토록 잘 완성된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면 뭔가 명답을 내놓지 않을까. 하지만 미타니 고키의 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평범했다. “어떤 이야기를 쓰든 처음에는 무리투성이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것을 계속 만지고 다듬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날 이후, 좋은 코미디란 그저 반짝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끊임없는 고민에서 비롯된다는 진리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 상당히 좋은 코미디를 만났다.
MBC의 새 시트콤 <스탠바이>는 가상의 방송사를 중심으로 <시사의 여왕>이라는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아나운서,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스탠바이>의 시작은 조금 특이하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잦은 실수로 방송사고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아나운서 류진행(류진)은 아버지 류정우(최정우)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 희정(김희정)과 결혼을 결심하는데, 그녀가 결혼식날 사고로 목숨을 잃자 희정의 아들 시완(임시완)을 데려와 키우기로 한다. 훈훈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거이거 왠지 낯익고 수상하다.
BL(Boys Love: 남성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여성향 만화, 소설 등의 창작물)의 세계에 대해 약간의 촉이 있는 시청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사랑했던 여성의 사후 남동생이나 아들을 데려와 부양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계약사기 당하는 바람에 한집에 살게 된 남녀가 투닥거리다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만큼이나 클리셰에 가까운 설정이다. 하지만 지상파에서는 참신할 수밖에 없는 이 설정이 일일 시트콤과 만나면서 <스탠바이>는 꽤나 귀여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특히 슬픈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눈망울을 배반하고 의외로 뻔뻔하거나 무신경한 고3 소년 역을 잘도 소화하는 임시완과 ‘최고의 사윗감’ 비주얼과 결벽증 허당 캐릭터가 공존하는 류진 역시 그 갭에서 오는 매력을 마구 발산한다. 다혈질에 자수성가해 권위적인 아버지의 전형으로 정계 진출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류정우, 초식동물처럼 순해 보이지만 사람 놀려먹는 낙으로 사는 류기우(이기우) 등 개성있지만 과장되어 있지 않은 가족들도 각 관계의 화학작용을 충실히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시완을 데려오도록 허락해주지 않으면 집안일을 파업하겠다며 버티는 진행 앞에서 류정우가 쿠션을 더럽히고 과자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하는 에피소드는 그 시작과 끝에 잘 잡힌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심지어 래퍼를 꿈꾸는 레스토랑 알바생 쌈디(싸이먼 D)나 ‘아부 10단’ 김연우(김연우) 작가조차 본업을 능가하는 연기력으로 웃음 포인트를 놓치지 않으니, <스탠바이>는 요즘 지친 직장인의 심신을 위한 주중의 피로회복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작품이다.
그 밖에 화가 치밀면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를 읽으며 분노를 가라앉히는 운동중독 아나운서 하석진이나, 형제 관계보다 더 허물없고 치사한 남매 관계를 보여주는 김수현-고경표도 있다. 또, 툭하면 “사회생활이 장난이야?”를 외치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울 속이었던 것 같은 왕고참 선배 아나운서 박준금의 투페이스 히스테리도 주옥같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이쯤에서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한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