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1960년대 초반부터 ‘바보상자’(boob tube)나 ‘정신을 위한 껌’(chewing gum for the mind)으로 불려왔다. 1961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 뉴턴 미노는 TV프로그램을 “거대한 황무지”라고 일컬었을 정도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TV는 달라졌을까. 이와 관련해 과학 저술가인 스티브 존슨의 <바보상자의 역습>은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는 이 책에서 TV를 비롯한 비디오게임, 인터넷, 영화 같은 대중문화가 인간의 두뇌를 급속도로 발전시켰다며 <소프라노스> 같은 현대의 드라마가 얼마나 지적인 구조로 짜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TV드라마가 독서 못지않은 지적 효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미드깨나 보신 분들이라면 <로스트> <24> <CSI>의 이야기를 쫓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빠른 두뇌 회전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TV는 똑똑해진 게 사실이다. 물론 한국 TV드라마가 지적인 유희를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엄청난 전개 속도를 보고 있으면 스티브 존슨이 이야기하는 ‘채워넣기’(교묘하게 생략되거나 숨어 있는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를 실감케 한다. 게다가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어마어마한 정보량을 처리하기 위해 뇌가 폭주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김태호 PD의 ‘자막 신공’은 가히 지적 유희라 할 만하지 않은가. (김구라가 출연하는) <라디오 스타>의 쏜살같은 대화나 (김정운 교수가 출연하던 당시의) <명작 스캔들>이 드러내는 ‘예능적 교양’의 세계는 두뇌에 확실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적 유희는 아닐지라도 <짝>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밀당’은 얼마나 큰 감성적 유희를 제공하는가.
물론 TV가 좋은 자극만 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청률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받는 방송 환경에서 각 프로그램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TV가 전달하는 그 많은 정보 중 상당량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맛집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폭로한 <트루맛쇼>의 교훈처럼 TV가 전하는 정보는 올바르지 않은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이 장악한 방송권력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실을 가린 채 말도 안되는 논리만 설파하고 있다(김경씨, 이번주 So What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러니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건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수동성에 있다. 틀기만 하면 술술술 나오고 이를 허허허 받아들이는 시청자의 모습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TV만큼 값싸고 접근하기 쉬운 오락거리도 없는 것을. 거실에서 과감하게 TV를 치워버릴 용기가 없는 우리는 TV에 세뇌당하지 않는 ‘비판적 독법’을 꾸준히 익히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