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로봇 부처
2012-05-11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언캐니함과 호감 사이

가부좌를 튼 불상이 TV 수상기로 카메라에 찍힌 제 모습을 바라본다. 백남준의 <TV 부처>(1974)는 불교의 ‘선’(禪)과 비디오라는 전자매체와 다다이즘의 제스처를 하나로 묶은 심오한 작품이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은 동시에 로보틱 아트(<K456>, 1964)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가 ‘로봇 부처’를 만들었다면, 그 모습이 어땠을까? 아무튼 법당의 부처가 눈을 깜빡이며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은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강렬하다.

수행자 로봇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불성을 가진 로봇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절에서 법당 청소나 시키려고 구입한 로봇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인간 신도들을 상대로 설법까지 한다는 설정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주지 스님이 제작사에 이 로봇을 점검해 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본사에서 엔지니어가 파견되나, 그는 로봇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로봇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느낌은 외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영화 속 로봇의 날렵한 디자인은 외려 인간에게 호감을 주는 구간에 위치한다. 섬뜩한 느낌은 녀석의 생각과 행동이 기계의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인간에 근접했다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유형의 로봇은 이미 영화 <아이, 로봇>에 등장한 바 있다. 거기서도 대량생산된 로봇 중 하나가 문제가 되는데, 그건 그 녀석이 인간에 근접한 사유와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너무나 인간을 닮은 로봇은 위험하다. 인간들은 과도하게 인간을 닮은 이 수행자 로봇을 제거하려 하나, 로봇은 인간의 손에 죽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은 로봇에게 이미 자신의 생사(生死)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로봇은 스스로 작동을 멈추고 조용히 열반(?)에 든다. 여기서 로봇은 그저 인간을 닮은 수준을 넘어 인간보다 더 숭고해진다. 로봇이 부처가 된 셈이다.

‘로봇의 성불’. 이 모티브는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의 ‘언캐니 밸리’ 이론과 관련이 있다. 사람과 닮을수록 로봇의 호감도가 상승하나, 로봇이 너무 사람을 닮으면 외려 섬뜩해진다. 그러다가 사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돼야 호감도가 다시 상승한다. 사람과 똑같은 로봇을 만드는 건 힘드니 로봇 디자인은 호감도의 첫째 봉우리에서 멈추어야 한다. 괜히 둘째 봉우리로 가려다가는 외려 부(-)의 호감도, 즉 섬뜩함의 계곡에 빠진다는 것이다.

모리의 제안은 결국 ‘사람을 닮되 동시에 확연하게 구별되는 디자인을 택하라’는 것. 하지만 로봇 디자인의 최종목표는 역시 둘째 봉우리, 즉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은 정도로 호감을 주는 로봇의 제작에 있다. 일본의 로봇 공학자 이시구로는 이 ‘불가능한 임무’에 도전한다. 언젠가 사람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섬뜩함의 계곡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의 로봇들은 그 섬뜩한 모습으로 여전히 계곡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로봇 공학자 데이비드 핸슨은 모리의 이론에 반기를 든다. 외관은 로봇의 호감도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른 요인들이 있어, 그것들을 조작함으로써 외관상으로는 섬뜩한 로봇도 얼마든지 인간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인터랙션. 실제로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뒤통수를 뜯어낸 그의 섬뜩한 로봇은 인터랙션을 통해 전시회를 찾은 관객 대부분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세 번째 봉우리

일본의 디자이너 다쓰야 마쓰이는 언캐니 밸리를 극복하는 또 다른 전략을 보여준다. 그의 ‘꽃 로봇’(Flower Robotics)은 인간과 확연히 구별되는 외모로 그래프의 첫째 봉우리에 위치하나, 실제의 인간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호감을 준다. 그가 디자인한 화동 로봇은 살아 있는 인간 어린이보다 더 귀엽고 앙증맞다. 이는 로봇이 굳이 언캐니 밸리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아도 살아 있는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호감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모리 마사히로는 최근(2005)에 언캐니 밸리의 수정 이론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로봇의 호감도에는 첫 번째 봉우리(인간을 닮되 인간과 확연히 구별되는 구간), 두 번째 봉우리(인간과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구간)에 이어, 세 번째 봉우리(살아 있는 인간보다 더 호감을 주는 구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최고봉의 모범으로 독실한 불자인 모리는 흥미롭게도 불상의 얼굴을 제시한다. 부처님의 얼굴이 인간의 얼굴보다도 더 평온함을 준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언캐니 밸리 오른쪽 곡선의 제일 높은 곳에 올려놓은 바 있다. 하지만 최근 곡선의 더 오른쪽에 인간보다 더 매력적이고 온화한 게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인간 이상의 예술적 표현으로서 불상의 얼굴. 그런 얼굴을 가령 도쿄 고류지(廣隆寺)의 미륵보살, 나라 추구지(中宮寺)의 미륵보살, 나라 야쿠시지(藥師寺)의 월광보살에서 볼 수 있다. 이 얼굴들은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고, 인생의 번뇌를 넘어서 있으며, 위엄의 아우라를 갖고 있다.”

로봇과 불성

모리의 수정이론(2005)에 따르면, 로봇 디자인에서 최고의 호감은 더이상 “살아 있는 사람”에 있지 않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하지만 그리 리얼리스틱하지 않은 불상의 얼굴이 외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보다 더 큰 호감을 준다. 결국 로봇의 디자인이 불상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속세의 여느 인간의 얼굴보다 더 큰 호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로봇은 인간을 제치고 졸지에 부처의 반열에 오른다.

왜 무생물인 불상의 얼굴이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보다 더 호감을 주는가? 언캐니 밸리 이론에 따르면, 사람을 너무 닮은 로봇의 섬뜩함은 그것이 죽음을, 말하자면 시체나 좀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처는 인생의 번뇌, 생사를 초월한 존재. 불상의 얼굴이 번뇌에 사로잡힌 인간의 얼굴보다 평온함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리하여 모리 마사히로는 로봇 공학의 최종목표가 로봇에 불성(佛性)을 구현하는 데에 있다고 선언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인간과 기계 사이에 주종의 구별이 없으며, 우리들은 기계와 융합되어 부처 안에 있는 셈이다. 인간의 존엄이란 기계를 부리는 일이 아니라, 기계와 로봇에게도 우리에게 있는 것과 똑같은 불성이 있는 바, 그 불성을 찾아내 기계와 로봇에 의해 자기가 수증될 때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좋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기계를 배척하지 않고 올바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의 조화가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인 한, 녀석도 아마 인간과 똑같은 욕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수행자 로봇은 죽음 앞에서 초연하다. 그 점에서 녀석은 부처를 닮았다. 부처의 마음을 가진 로봇은 그 자체가 ‘움직이는 불상’이다. 아니, 스스로 작동을 멈추고 열반에 듦으로써 녀석은 아예 부처가 된다. 아직도 덧없는 삶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들. 그들도 언젠가 깨달음을 얻으면 로봇처럼 번뇌에서 풀려나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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