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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이만하면 지존이지
2012-05-11
글 : 유선주 (칼럼니스트)
엄태웅의 세 번째 복수극 <적도의 남자>

허세도 비굴함도 괜한 말치레도 없는 단정한 성품이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 그가 친구라면 어쩐지 상상 속의 목돈이나마 맡겨도 좋을 것 같다. 알량한 통장 잔고를 한탄하며 포털 사이트 인물정보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쓰고 엔터키를 탁 쳤더니 사진 속 그는 도리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갚아도 돼’라고… 아아 환청이 들린다! 배우 이야길 하면서 가상의 돈거래를 떠올리다니 뭔가 크게 잘못된 기분이 들지만 아무튼, 엄태웅을 보면서 금전거래에도 탁해지지 않는 희귀한 우정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 남자의 신의를 저버리면 저절로 몹쓸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이나 신뢰에서 출발하는 복수극에 엄태웅이 등장하면 진폭이 커진다. 그리고 그 남자는 공소시효 따위 아랑곳않고 반드시 돌아온다.

KBS 드라마 <적도의 남자>는 그의 세 번째 복수극이다. 자살로 위장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는 선우(엄태웅)는 아버지가 진 회장(김영철)을 만나러 갔던 것을 알게 되고 재수사를 청하는 진정서를 준비한다. 그를 돕던 친구 장일(이준혁)은 진 회장네 잡일을 하던 아버지가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되고, 마침 딱 좋은 자리에 놓여 있던 나무토막을 들어 선우의 뒤통수를 때린 뒤 바다에 밀어넣는다. 가까스로 구조된 선우는 의식을 잃은 채 몇년을 흘려보내다 깨어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 사고 당시의 기억을 잃은 척하며 어둠 속에서 다시 사건의 경위를 쫓던 선우는 아버지의 옛 친구를 따라 미국으로 향하고 13년 뒤 성공한 사업가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장일의 숨통을 조여갈 시나리오를 짜고 그 안의 배우가 된다.

엄태웅은 김지우 작가, 박찬홍 감독의 KBS 드라마 <부활>과 <마왕>에서 심판하는 자와 심판 아래 놓인 자의 심리를 모두 경험했다. 동전에 비유하자면, 복수극의 이쪽과 저쪽을 모두 그 몸에 새긴 셈이다. 그 덕분인지 <적도의 남자> 역시 연극을 행하는 복수자의 심리 상태를 넘치지 않게 짚어내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귀국하자마자 장일 부자에게 만나고 싶다고 청한 선우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부유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다. 기억을 잃었다는 선우의 말을 늘 의심하고 실은 앞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초조해하던 장일은 불편한 재회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뜬다. 멀어지는 발소리. 선우는 천천히, 어긋나 있던 양 눈동자의 초점을 맞춘다. 극에 굵은 느낌표를 찍는 순간. 아마 본 분들은 알겠지만 장일 부자와 마주앉은 선우의 행동거지나 눈동자의 움직임은 13년 전 눈이 보이지 않던 시절에 비해 다소 부산스럽다. 시각장애인 연기와 시각장애를 가장하는 연기의 차이. 김인영 작가와 김용수 PD는 그 차이를 요구했을 테고 엄태웅은 그 간극이 희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에서 표현한다.

물론 <적도의 남자>는 성에 차지 않는 구석도 있다. 어린 선우와 장일의 우정 겉핥기식 같은 에피소드.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데 진짜로 무슨 생각인가 싶은, 미숙한 연기를 하는 배우도 있고 간혹 컷간의 인물 동선이 어긋날 때도 있다. 사슴 쫓는 사냥꾼 앞에서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어깨 뒤 사슴과 눈을 맞춘 뒤 다시 ‘저쪽으로 갔어요’라고 말하는 식의 뒷목 잡을 만한 장면. 서스펜스가 실패해 종종 의도치 않은 코미디가 되는 연출도 때로 불안하지만, 뭐랄까 현실적으로 염치없는 사람들이 형편이나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입장을 바꾸거나 그들이 알게 된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공모자가 되는 모습을 집요하게 쫓는 것을 보면, 이 드라마 그저 짜릿한 몇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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