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가 나올 때면 <부운>과 <라탈랑트>와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들먹이곤 했다. 사랑이란 걸 제대로 못해본 탓이다. 내 경험을 말하자니 하도 하찮아서, 거창한 로맨스의 주인공들을 대신 끄집어내 감정이입을 하는 척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체면치레라도 되는 줄 알았다. 몇년 전 <아키츠 온천>을 보자마자 나는 위대한 로맨스의 리스트에 이 작품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내 빈곤한 로맨스의 역사를 채워줄 불쌍한 희생자가 한명 더 탄생했다. 벚꽃이 한창이면 생각나는 이름, 그녀의 이름은 신코다. 요시다 기주 혹은 요시다 요시시게라는 이름을 지닌 감독의 영화라면 성, 정치, 실험 등을 먼저 떠올리던 내게 그의 초기 작품인 <아키츠 온천>은 오히려 낯선 영화였다. 대개 모던 시네마로 읽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키츠 온천>을 고전적인 멜로드라마로 기억한다. 훗날 요시다의 아내가 되는 오카다 마리코가 잊지 못할 연기를 선보인다. 그녀 특유의 강인함에 섬세함을 더한 연기는 일품이다. 우리에게 <맨발의 청춘>으로 알려진 후지와라 신지의 초기작이 원작이다.
종전이 임박한 시기, 시골 여관집 딸 신코는 절망에 빠진 청년 가와모토의 생명을 구한다. 분명 선행이었다. 그러나 연이라는 것은 이따금 모질게 인간을 괴롭힌다. <아키츠 온천>은 이후 20년 가까이 단속적인 만남을 반복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뒤따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사랑이 더 강렬해졌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이 애끓고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당연히 남자의 마음은 그녀의 그것을 배반한다. 멜로드라마니까. 벚꽃이 흩날리는 어느 봄날, 전날 밤에 그녀의 몸을 탐했던 남자는 다시 그녀를 떠난다. 면도칼을 꺼내보지만 발걸음을 재촉하는 비열한 인간 앞에서 덧없기만 하다. 그녀는 손목을 긋는다. 무심한 강물에 피를 흘려보내며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내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내가 절절한 사랑의 대상이라도 된 양 착각한 데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내가 그녀라면 분노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사랑에 관한 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소수의 인간과, 부질없는 사랑의 안팎으로 한치 영혼을 들락거리는 다수의 인간이 존재한다. 가와모토와,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의 스테판이 그런 인간의 이름들이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스테판이 밤을 나눈 여인 리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내가 바로 스테판이다. 그런 인간은 자기만 알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신코와 리사는 환상이다. 예전에는, 신코와 리사의 죽음에 이르러 가와모토와 스테판이 그녀의 사랑을 깨달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인의 죽음을 두고 그들이 보이는 눈물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키츠 온천>을 본 뒤에도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애써 주장하고 싶지만, 어쨌든 그 사랑도 끝난 지 오래다. 눈앞에서 당신이 절명해도 나같은 인간은 변할 수 없을까. <아키츠 온천>은 그렇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