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엘리야 우드
2002-01-23
글 : 황혜림
작은 영웅, 안식없는 순례길에 오르다

도대체 이 반지가 왜 나에게 온 것일까. 거역할 수도, 다스릴 수도 없는 운명을 작은 어깨에 지고, 짙푸른 눈동자에 수시로 깊은 번민의 그늘을 드리우는 프로도 배긴스. 하지만 실은 그 눈에 반지를 거머쥔 기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엘리야 우드는 부단히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을까. 9살 동심을 설레게 했던 <호빗>에 나온 것 같은 호빗이 되다니.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줄 알면서도 모두가 욕망하는 절대반지처럼 수많은 또래 배우들이 탐냈을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에 덜컥 선택되다니.

짧지 않은 그의 배우 인생에서도 이보다 더 커다란 사건은 없었으리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반지가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할 게 아니라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마법사 간달프의 조언처럼, 우드는 주어진 기회에 충실하게 빠져들었다. 호빗족의 터전인 샤이어의 안온한 초원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어했던 프로도, 빌보 삼촌의 111살 생일날 물려받은 절대반지를 모르도르의 화염에 던져넣기까지 안식없는 순례를 계속해야만 하는 키작은 영웅이 되기 위해. 갓 스물한살이 됐을 뿐이지만, 엘리야 우드는 반평생이 넘도록 영화 세트에서 자란 아역배우 출신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뮤지컬에 발탁되곤 하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모델 학교를 찾은 것이 7살 때. 88년 LA에서 열린 모델 및 탤런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아이오와주를 떠났을 때만 해도, 그는 “처음으로 야자수를 본” LA의 모든 것이 그저 신기했던 꼬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회 심사위원이자 매니지먼트 관계자의 눈에 띄어 가족과 함께 LA로 이사하면서부터 어린 우드의 ‘샤이어’는 세트였다. 6개월가량 오디션을 거쳐 낙점된 첫일은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한 폴라 압둘의 뮤직비디오 . 이후 <유혹은 밤그림자처럼> <백 투더 퓨처2>의 단역으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 우드는 유대계 이민 3대를 다룬 배리 레빈슨의 90년작 <아발론>,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의 상처를 다독여주는 소년으로 분한 <파라다이스>, 폭력적인 계부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두 형제의 판타지를 담은 리처드 도너의 <라디오 플라이어> 등 범상한 가족영화의 범상치 않은 얼굴로 자라왔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의 생기발랄한 허크, 무심한 부모 대신 새 부모를 찾아나서는 <브루스 윌리스의 와일드>의 당돌한 노스, 돌고래와 우정을 나누는 <플리퍼>의 샌디로 이어진 그의 분신들은,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의 조숙한 진지함을 품어왔다.

“아주 불안하고 바보 같은, 치열한 세계”라고 회고하는 아역배우로서의 성장기를, 그는 가족의 보호 아래 욕심없이 건너고자 애썼다. 매년 1∼2편씩 꾸준히 영화를 찍으면서도 지나친 스포트라이트를 경계한 것은 소모되기 쉬운 할리우드 아역스타의 함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대신 “다른 캐릭터들에 빠져들어 그들 자신뿐 아니라 인생에 대해 배울 수 있게 하는” 연기를, 좋은 인생수업으로 삼았다. 사춘기의 성적 호기심에 빠져드는 <아이스 스톰>의 마이키나 종말의 위기에서도 어린 사랑을 책임지고자 하는 <딥 임팩트>의 레오는 성장의 고민과 함께 아역에서 10대 연기자로 가는 좁은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줬고, 외계인 선생님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패컬티>는 실제 가본 적 없는 고교생활을 선사했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가 되고 싶었던 것도, “그 캐릭터들의 여정은 물론, 모든 종족과 사람들의 개성이 독특한” 세계를 살아보고픈 마음이 컸던 때문이다. 호빗 같은 의상을 구해입고 찍은 오디션 테이프에서, 피터 잭슨은 절대권력의 유혹에 넘어갈 법한 사념이라곤 없는 그의 무구하고 진지한 눈을 본 걸까. 150명이 넘는 배우들을 마다한 잭슨은 대뜸 “와우, 프로도잖아”라는 탄성과 함께 절대반지를 우드에게 넘겼다. 1999년 여름, 뉴질랜드로 불려간 순간부터 시작된 우드의 <반지의 제왕> 3부작 여정은, 15개월 이상의 촬영을 마치고 톨킨 팬들의 집요한 기대를 살아냈다. 올해와 내년 겨울에 찾아올 <반지의 제왕> 2, 3편의 신화를 슬쩍 한켠에 밀어두고, 그는 벌써 전혀 다른 얼굴을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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