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영화 3편 보기, 일주일에 책 세권 읽기, 이것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원칙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열혈 필자이자 영화감독인 트뤼포를 수식하기 위해 우선 골라야 할 두 단어는 ‘시네필’과 ‘누벨바그’이다. 영화 리스트를 작성하고, 등급을 매기고,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수집하는 시네필의 전형적 행동 양식을 누구보다 먼저 실천하고 영화를 통해 영화를 배우고 익혀 글을 쓰고 스스로 영화를 만든 인물이 트뤼포다.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것,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 영화를 만드는 것, 그는 자신이 주장했던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을 순서대로 따랐다. 1950~60년대 프랑스영화는 <카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 출신 감독들이 만든 일련의 영화들로 새로운 활기를 띠는데,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 ‘누벨바그’였다. 트뤼포 감독의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1959)는 누벨바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 영화는 시작 전 자막으로 “앙드레 바쟁을 기억하며 그에게 헌정하는 영화”라고 밝힌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탄생시키고, 트뤼포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누벨바그의 개막을 알리는 <400번의 구타> 첫머리에 언급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5월15일부터 열리는 ‘프랑수아 트뤼포 전작전’은 총 23편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1954년부터 1983년까지 만들어진 트뤼포 영화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의 분신인 ‘앙투안 드와넬’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400번의 구타>에서 14살 소년이던 앙투안은 불안정한 17살을 거쳐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 이혼을 한다. <앙투안과 콜레트>(1962), <훔친 키스>(1968), <부부의 거처>(1970), <사랑의 도피>(1979)에 기록되어 있는 이 모든 과정은 트뤼포 자신의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양부의 성을 받은 트뤼포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아이로 성장하면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거짓말과 비행은 트뤼포에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통과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제도권에서 용납받기는 어려웠다. 어머니와 생부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평생 트뤼포를 괴롭혔으며,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은 도피처인 연애마저도 늘 실패로 끝이 났다.
앞서 언급한 앙드레 바쟁 외에 트뤼포에게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로 발자크와 히치콕이 있다. 발자크는 그의 영화에서 때론 사진으로 때론 소설 인용을 통해 등장하는데, 변화하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와 인간 군상에 대한 발자크의 호기심과 관찰력은 트뤼포와 상통한다.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스승인 히치콕이 단지 흥행 솜씨가 있는 장인이 아님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나중에는 6일간의 대담을 정리한 책을 냈다. 국내 번역된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으나, 트뤼포 생애와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유문화사 펴냄)을 추천한다. 저자들은 발자크처럼 트뤼포의 모든 것을 수집하고 정리하려 노력하고 글로 옮겼다.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해줄 좋은 레퍼런스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 <쥴 앤 짐>(1962), 갱스터를 자기식으로 해석한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레이 브래드베리의 동명 SF소설을 각색한 <화씨 451>(1966), 카트린 드뇌브를 만난 <미시시피 인어>(1969), 영화를 만드는 것에 관한 영화 <아메리카의 밤>(1973), 마지막 작품인 히치콕식 미스터리 <신나는 일요일>(1983)까지 트뤼포 영화가 망라된 이번 전작전은 6월7일까지 이어지며 김성욱, 정성일, 박인호 평론가의 특별강연과 영화해설 시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