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교육’의 참의미를 일깨워주다 <퍼스트 그레이더>
2012-05-16
글 : 윤혜지

알파벳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앳된 얼굴들 사이에 뾰족한 연필심처럼 혼자 툭 튀어나온 키 큰 노인이 있다. 최고령 초등학생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키마니 낭아 마루게(올리버 리톤도)다. 케냐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케냐의 키쿠유족은 영국군에 대항해 무장독립단체 ‘마우마우’를 결성한다. 케냐 독립을 위해 싸운 마우마우의 전사였던 마루게는 영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수용소를 전전하며 힘든 세월을 견뎌왔다. 2003년 케냐 정부에선 케냐의 모든 국민이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법안을 발표하고, 라디오에서 이 뉴스를 들은 마루게는 글을 배워 꼭 자기 눈으로 읽어야만 하는 편지가 있다며 마을의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교장 제인(나오미 해리스)은 초등학교는 어린이만 오는 곳이라며 마루게를 돌려보내지만 마루게는 교복을 마련해 입고 다시 학교를 찾아온다. 마루게의 향학열을 인정한 제인은 마루게의 입학을 허가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배울 권리를 박탈한다며 마루게와 제인을 배척한다.

<퍼스트 그레이더>는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케냐 민족내부의 분열도 담아내고 있다. 식민지 시절, 끝까지 영국에 저항했던 키쿠유족은 영국에 복종한 타 부족에도 적개심을 갖고 있다. 칼렌진족 출신인 제인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반박하지만 마루게는 키쿠유족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외친다. 그 이후로 제인은 마루게를 지키기 위한 결심을 굳힌다.

고문을 받아 잘 들리지 않는 마루게의 귀에는 죽은 가족의 울음소리가 맴돌고, 마루게는 과거의 아픔을 그저 안으로만 덮어두고 산다. 마루게가 글을 배워가는 과정은 스스로 과거를 긍정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학교에 가기 위해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를 짚은 채 먼 길을 터벅터벅 느리게 걷는 마루게의 굽은 등은 흡사 고행 중인 수도사의 모습 같다. 마루게에게 배움의 길을 걷는 시간은 등에 진 무거운 과거를 풀어내는 시간이다. 끝이 뭉툭한 연필로 알파벳을 꾹꾹 눌러쓰며 마루게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늘 화난 듯한 표정만 짓던 마루게는 그림 카드에 적힌 단어들을 더듬더듬 읽으며 배움에 대한 순수한 기쁨으로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마루게의 굳은 얼굴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표정들이 슬슬 풀려나오는 이런 순간들은 종종 인물들의 표정을 아주 가까이서 잡는 카메라 덕에 관객의 눈에 온전히 들어온다. <퍼스트 그레이더>는 A, B, C를 정확하게 쓸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교육’의 참의미를 일깨운다.

다시 돌아오는 5월18일 영화관을 찾을 계획이 있다면 <퍼스트 그레이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더없이 좋은 선택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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