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는 한 젊은 여배우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영광의 기억으로 남았다. 여대생에서 창녀가 되고, 자신을 창녀로 만든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선화가 되어가는 과정은 배우 서원에게 고통스런 경험이었지만, 그것이 평생 잊지 못할 커리어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저, 사진 먼저 찍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나쁜 남자>에 대해, 선화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에 우물우물하던 서원이 불쑥 말한다. “<나쁜 남자> 이야기를 하면 촬영 때의 일이 떠올라 표정까지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어두워지거든요.” 무엇이 그리도 괴로웠을까. “선화로 있어야 하는 제 모습이 끔찍했어요.” 파괴된 자신과 현실을 거부하던 초반의 선화는 차라리 쉬웠다. 중반부터 모든 것에 초연해져 멍하게 앉아 있는 선화는 선뜻 몰입할 수 없었다.
선화를 만들어낸 건 전적으로 김기덕 감독이었다. 워낙 리얼한 시나리오를 받아든 서원이 한 일은 단 두 가지. 최대한 자신을 선화에게 맞추기, 선화 속으로 들어가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졌고, 촬영장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촬영장에서 거의 자폐였어요. 말도 안 하고. 촬영 없을 때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제가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요.”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밝았다는 서원은 선화 때문에 “영혼을 다쳤다”. 그 말에 약간의 엄살과 어리광이 얹혀 있을지라도 <나쁜 남자>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파괴적인 사랑에 휘말린 여성의 고통 속으로 몰입하면서 상처입지 않을 만큼 단단한 영혼은 흔치 않을 테니.
<나쁜 남자> 촬영이 끝난 뒤 서원은 의식적으로 자기 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은 선화를 떠나보냈다. 친구를 만나고 콘서트며 뮤지컬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더이상 선화로 살지 않기. 서원으로 살기.’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쁜 남자>의 기억의 편린들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데 영화가 개봉했고, 서원은 다시 악몽으로의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악몽이었어요.”
실제로 처음 시나리오를 읽은 뒤 서원은 자주 울었고, 끊임없이 자신이 선화의 상황에 빠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원래 감정의 기복이 심한데, 시나리오 보고 나서 계속 울었어요. 그냥, 이유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슬프다, 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시나리오 들여다보기가 힘들었어요.” <섬> 때 다방 레지 역으로 김기덕 감독과 작업을 해본 적은 있지만, 이만큼 지독하게 ‘다칠’ 줄은 몰랐다. “감독님 영화를 좋아했어요. 관객으로 보는 건 좋았는데 실제로 감독님 영화에서 연기를 하는 건 좀….”
그래서 지금 심정은 “당분간 이런 역은 사양합니다”. “머리를 비워야 뭔가를 담을 수 있는데 아직 다른 걸 담기가 힘들다”는 게 그 이유. 독특한 영화, 독특한 역할은 젊은 배우에게 자칫 족쇄일 수도 있다. 좀더 시간이 흐르고 선화의 흔적을 지운 뒤, <나쁜 남자>류의 파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따뜻하고 정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는 것도 그런 불안에 대한 방어막이리라.